여행

수안보로의 3박 4일 가을여행

강일형(본명:신성호) 2024. 11. 7. 13:59

 

11월의 첫 번째 주말이다. 원래 매년 첫째 일요일은 충북 미원면 가양리에 가서 시제를 지내는 날이라 예년에는 온갖 일을 다 제쳐놓고, 새벽에 일어나 고향으로 내려가서 시제를 지내고 오후에 올라오곤 했었다. 그러다 올해는 충북 미원으로 바로 가지 않고 둘째 형수님이 몸이 많이 불편하신데도 밑에 아우가 수안보로 이사를 했다고 하니까 가보신다면서 조카가 모시고 가는 차에 우리 내외는 그냥 묻어서 수안보 여행길에 올랐다. 수안보는 잘해야 십여 년에 한 번 가볼까 말까 할 정도로 뜸하게 다녔었는데 올해 들어서는 밑에 동생 덕분에 꽤 여러 번을 가서, 물론 동생과 제수씨께는 폐를 많이 끼치기는 했어도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었다가 왔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안보에 가서 전에 가보지 않았던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그 얘기를 하려고 한다.

 

우선 첫날은 토요일인 데다가 집에서 좀 늦게 출발하였더니 가는 길이 막바지 단풍객들로 도로가 밀렸다. 휴게소에 들르지 않고 부지런히 내려갔어도 점심 때가 좀 지나서야 수안보의 아우네 집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가 내려간다고 하니 아우가 집 마당에 솥을 걸어 놓고 이것저것 몸에 좋다는 약재를 넣고 돼지고기를 푹 삶아 놓은 편육에다가 소백산 막걸리를 반주로 식탁에 모여 앉아 고향은 아니지만 고향에 온 기분을  냈다. 계절이 11월이고 보니 단풍의 절정시기는 좀 지났어도 앞·뒷산은 물론이고 옆산까지 어디를 둘러봐도 울긋불긋한 단풍은 가을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보여 주었다. 

 

가을 해는 짧아서 금방 넘어간다. 더군다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산속 마을은 해가 늦게 뜨고 일찍 넘어가서 오후 서너 시만 돼도 길게 산 그림자가 마을에 드리운다. 우리를 여기까지 태워 주웠던 조카는 더 늦기 전에 거동이 불편하신 형수님을 모시고 올라가고, 우리 내외와 동생내외만이 수안보에서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텃밭에서 뜯어온 푸성귀와 가을걷이가 덜 되어 붉으스레 익어가는 방울토마토로 저녁 식탁을 풍성하게 하였다. 저녁밥을 먹기 전에도, 저녁을 먹고 나서 막걸리를 마시면서도, 또한 오미자주를 마시다가도 다른 안주가 필요 없을 정도로 오직 토마토로만 자주 손이 가서 꽤 많이 먹었다. 여기의 시퍼렇게 익다말은 토마토가 도회지에서 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맛이 몇 배 더 출중했다. 아주 오래전에 어린 작은아들을 데리고 어머니가 계신 충북 미원면 종암리 벌말부락에 왔다가 저녁에 저수지로 낚시를 나갔다 오니 어머니께서 찐빵과 옥수수를 쪄놓으시고, 텃밭에서 기른 잘 익은 토마토를 듬성듬성 잘라서 커다란 양푼에 담아 놓은 것을 수저로 퍼서 한입에 넣어보니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그 맛을 여태까지 잊지 못하고 있었는데 여기 수안보에 와서 비록 방울토마토이긴 해도 그 맛을 보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바깥으로 나가니 깜깜한 밤이라 동남쪽으로 시리우스가 환하게 빛나고 있고, 그 우측 밑으로 마름모의 사각형 안에 삼태성이 있는 오리온이 나도 보라고 불러댔다. 북두칠성이 있는 북쪽 하늘로 돌려보니 골목길의 가로등 불빛이 환하여 큰곰자리와 작은 곰자리는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수안보로 가을에 와서 3박 4일의 첫 번째 밤을 별과 함께 보내고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바깥을 나가니 땅바닥에 찬이슬이 내려서 마치 비가 내린 듯했다. 오늘은 동생내외와 같이 청주시 미원면으로 이동하여 시제를 지내러 가면서 종암리에 계신 큰형님한테 들렀다가 가양리 불무골로 가서 팔계당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여 숭모당으로 모신 사성공 할아버지까지 무려 4번의 시제를 지내야 해서 일요일이지만 서둘러 집을 나섰다. 괴산읍내를 지나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이 가까워지자 차가 밀리고 잘 가질 못했다. 문광저수지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이리로 몰려들어 주차장이 만차여서 들어가지 못하고 길가에다 주차를 하다 보니 이렇게 차도 밀리고 주위가 혼잡하게 되었다. 물론 교통정리 요원이 있어도 원체 많은 차량이 단 시간에 몰려들다 보니 통제에 어려움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그곳을 간신히 빠져나와 청주 미원을 향해 달려갔다. 청천을 지나 미원입구가 나오자 좌측으로 미원중학이 나왔다. 여기서 중학을 다닌 지가 60년이 다 되어 간다. 지금은 학생 수가 30명이 채 안 된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든다. 그런 데다가 필자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폐교가 된 지 오래라서 저렇게 덩그러니 건물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 농촌에서는 애들은 찾아볼 수 없고, 노인만 가끔씩 눈에 띈다. 이 노인들이 향후 10년을 사신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는데 그때 가면은 이 농촌이 어떻게 변해 갈지 그것이 더 걱정이다.

 

우리 세대까지야 고향을 찾아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고 자손들의 안녕과 번영을 축원하며 시제를 지냈지만, 이제는 사람이 없고 자손이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정오가 훨씬 넘어 시제를 마치고 시제 음식으로 한 끼를 때웠다. 그리고 동생내외와 수안보로 돌아오다가 청천 삼거리에서 문광저수지 쪽은 관광객들로 길이 밀릴 것으로 보고 그쪽으로 빠지지 않고 청천 쪽으로 우회하여 쌍곡계곡을 향했다. 쌍곡계곡은 필자가 젊었던 시절에 둘째 형님 식구들과 같이 왔다 갔으니 거의 40년은 족히 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 근처에 오니 기억이 떠올랐다. 계곡이 산 정상부터 길게 형성되어 산 밑으로 이어져 있어 구석구석 골짜기마다 피서객들이 들어가서 놀기가 좋았다는 것이 쌍곡계곡의 특징이다. 산이 깊은데도 아직 낙엽되지 않고 군데군데 남은 단풍을 찾아 이리저리 목을 돌려 단풍 구경하고 내려오다가 '소금강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용변도 보고 차도 한잔 마셨다. 

 

가을에 수안보로 와서 셋째 날은 느지감치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서 어제 많이 밀렸던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을 가서 운동도 할 겸 그 길을 걷기로 하였다. 어제는 일요일이고 오늘은 월요일이라서 한가할 것이라고 갔는데 오늘도 차량통제를 할 정도로 차도 많고 주차장도 만차여서 주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가장 안쪽 주차장으로 들어오니 주차 공간이 있어 주차해 놓고 본격적으로 저수지 둑방길을 한 바퀴 걸었다. 거리는 2km 남짓이고 시간은 천천히 걸어서인지 4-50분 걸리지 않았나 싶다.

 

은행나무는 군데군데 잎이 다 떨어지긴 했어도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울긋불긋 핀 코스모스 밭 너머로 커다랗게 입석으로 된 '광개토대왕비'가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은 한 일주일 정도 빨리 왔으면 그때가 절정이었을 것 같다.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한꺼번에 하늘을 가릴 정도로 많이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는데 이만한 곳도 찾기가 쉽지 않겠다 싶다.

 

문광면 은행나무길을 빠져나와 점심 식사 때가 되어 연실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아봐도 식당을 찾았다 싶으면 차 댈 곳이 없고, 차 댈 곳이 있어 차를 세우고 식당을 찾으면 식당이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괴산 읍내를 다 빠져나와서 감물면 자치센터를 지나다 길가에 현수막으로 된 '시골밥상'집이 보여 들어갔는데 한식 뷔페집이었다. 시골길이고 허름한 식당이어서 맛은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가 우리 일행은 접시를 잡고 밥은 쌀밥이 아닌 잡곡밥으로 푸고, 각종 나물이 즐비한데 이것저것 챙겨서 된장 우거짓국을 퍼들고 식탁에 앉아 맛을 보았다. 첫맛이 정말 우리들이 시골에서 즐겨 먹었던 그 맛이었다. 반찬 하나하나가 다 맛이 한결같았다. 나만 그런가 하여 일행에게 물어보니 다들 맛이 있다고 한다. 이런 촌 동네에 이처럼 훌륭한 맛집이 있다는 것에 놀랐고, 가격이 1인당 7천 원이라는데 또 한 번 놀랐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나서 우리의 여행 목적지가 있는 수주팔봉까지는 15분이 채 안 걸렸다. 수주팔봉은 충주시 살미면 토계리에 있는 493m 높이에 있는 산봉우리를 말하는데, 석문동천과 달천이 만나서 합수지점 뒤로 민가가 있고, 달천이 빙돌아 나가기 때문에 수주팔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답다. 이와 비슷한 예천의 회룡포, 영월의 한반도 지형보다 선이  굵게 나타나서 보기가 더 선명하고 똑똑하게 보인다. 구름다리를 건너 수주팔봉 전망대까지 험한 산길따라 땀을 흘리고 걸어 올라가면서 괜히 올라가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올라가서 보니 잘 올라갔다는 생각이 든다. 가지 않았으면 그 멋진 풍경을 보지 못할 뻔했다.

 

오늘도 수주전망대까지 올라 가느라고 땀을 흘렸고, 또 어제도 기온이 25℃를 상회하여 시제를 지내는 내내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여기 수안보까지 와서 족욕탕에 가서 발만 담그고 전신 온천욕을 하지 않고 그냥 간다는 것은 '앙꼬 없는 찐빵'을 먹는 것처럼 수안보 여행에서의 실속 있는 여행이라고 할 수 없다. 수안보에 오면 으레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꼭 대중탕에 들어가 전신욕을 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이번에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중탕으로 가서 온천욕을 하여 여독을 풀었다.

 

3박 4일의 수안보 가을 여행이 벌써 끝나가고 있다. 이번 여행은 동생이 수안보에 살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여행이었다. 우리 내외를 충주, 괴산, 제천, 청주(미원) 등 여러 군데를 데리고 다니며 구경시켜 준  동생내외께 고맙다는 인사와 동생과 제수씨 두 분 덕분에 우리 내외가 연나흘간을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다가 왔다고 본다.

 

여행은 마약 같은 것이어서 하고 얼마 되지 않아도 또 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참으면 병이 되니까 우리처럼 가까운 데라도 찾아 떠나면 한동안 잊고 살아도 정신적으로는 건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여행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여유를 주어,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고 생각한 것에 대해 풀어갈 기회를 가질 시간을 준다. 어떤 여행이든 떠났다 오는 것만으로도 삶에 윤활유가 되고 건강한 삶의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