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한동안 날씨가 상당히 좋았다. 그래서 요즘 날씨를 보고서는 “날씨가 참, 좋다.”라고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고 한 마디씩 하였는데, 그렇게 여태껏 좋았던 날씨가 우리가 경남 진영으로 여행 간다고 하는 첫날인 10월 22일은 비가 많이 온다고 하여 걱정을 하였지만, 비가 오긴 왔어도 예상하였던 것보다 그리 많이는 내리지 않아 여행하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이 여행은 필자의 막내 남동생이 경남 김해의 진영에 살고 있는데 수년 전에 제수씨 하고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는 것이 늘 안타깝고 안돼 보여 한번 가본다면서도 너무 멀고, 엄두가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동생이 누님과 같이 한번 내려오라고 하여 경남 진영으로 가을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경기도 광명역에서 오후 1시 7분에 출발한 ktx 열차는 오송, 대전, 동대구, 밀양을 정차하고 바로 진영으로 가는 열차였는데 진영까지는 채 2시간 20분이 안 걸렸다. 마침 아우가 차로 마중을 나와서 진영에서의 여행이 바로 시작되었다. 첫 여행지로는 지금은 고인이 되어서 만나볼 수 없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영면하고 계신 산소와 태어나고 자랐던 생가가 있는 ‘봉하마을’이다. 진영역에서 봉하마을까지는 7, 8분 정도 걸렸다. 봉하마을은 필자는 이번이 세 번째 여행이지만, 마누라나 누님은 이번이 첫 여행이어서 그 어떤 여행보다 상당히 소중한 여행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우선 봉하마을을 본격적으로 여행하기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얘기를 해보자.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2003.02.~ 2008.02.)을 역임한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9월 1일에 태어나서 2009년 5월 23일에 62세로 생을 마쳤다. 출생은 경남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빈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향학열이 강하였으며 또한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입학금이 없어 외상으로 입학한 중학교 1학년 말에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백지동맹을 선동하다가 정학을 당하기도 하였다. 가세가 더욱 기울어 중학을 졸업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장학금 및 주위의 후원으로 가까스로 중학을 졸업한 후 지방 명문이었던 부산 상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마지막 학업을 마쳤다. 막노동하면서 고시 공부를 하던 1973년에 권양숙 여사와 결혼하였고, 1975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을 거쳐 1977년에 대전지법 판사로 법조인의 첫발을 내디뎠으나 그 이듬해 법복을 벗고 변호사로 개업하여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그 후 1981년 전두환 정권 시절에 대대적인 반정부 세력의 소탕 작전으로 부산지역의 민주인사 22명이 무더기로 구속되었던 이른바 부림사건(釜林事件)은 노무현이라는 인권 변호사의 출현을 알리게 되었다. 약 3개월간의 구금과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학생 운동가들과의 만남은 치열한 시대정신으로 이어졌으며 노 전 대통령의 삶에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재야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노 대통령은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등의 시국·노동 사건의 변론과 노동자의 권익 보호 외 노동운동 등을 통하여 신망받는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서 6월 민주화운동을 이끌었으며, 8월에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다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희생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사망 사건에 관여하다 제3 자 개입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20여 일 만에 풀려나왔지만, 변호사 업무 정지라는 정치보복을 당하였다. 정계 입문은 1988년 4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제13대 총선에서 그 당시 신군부 실세였던 허삼수 민정당 후보가 있는 부산 동구에 출마해 승리하면서 화려한 정계에 입문하였다. 같은 해 11월 TV로 생중계된 국회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의 집권 민정당, 김영삼의 제2야당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의 이른바 3당 합당은 호남대 비호남으로 갈라놓았다. 하여 부산·경남의 정치적 맹주인 김영삼과 결별하였고, 3당 합당을 거부한 몇 명의 통일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소수 야당인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1992년도에 제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했으나 지역감정으로 민자당 허삼수 후보에게 밀려 재선에 실패하였다. 또한 1995년에 있었던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낙선하면서 연속적으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그런 데다가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해 정계를 떠났던 김대중이 1995년 9월에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를 창당하자 야권분열로 규정하고 김대중과 결별하였다. 기존 정당의 보스에 줄 서거나 이합집산을 거부한 결과 15대 총선에서 민주당으로 종로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제15대 대통령선거(1997년)를 앞두고 자신이 속한 국민통합추진회의 구성원들이 의견이 충돌하자 정권교체의 명분으로 김대중의 국민회의에 합류하여 50년 만에 첫 여야 정권교체를 이끌었다. 이듬해 서울 종로 보궐선거를 통해 6년 만에 원내 입성에 성공하였으며 평생의 꿈인 동서화합을 실현하기 위해 제16대 총선(2000년)에 부산의 북·강서을에 출마했으나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를 계기로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결성되었다. 이후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하며 행정가로서 수단을 발휘한 뒤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정치권에 복귀하여 제16대 대통령선거 후보경선에 나섰다.
2001년 9월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출마를 선언했지만, 계파도 없고 조직도 없는 그로서는 오직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으로만 승부를 해야 했다. 주류인 동교동계에서는 이인제를 후보로 두고 있던 때라 이인제 대세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민주당이 내놓은 대통령 후보 국민참여 경선제는 당원 외에도 일반 국민이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서 노무현 후보에게는 절호의 기회를 안겨주었고, 16개 시·도에서 49일간 실시된 경선에서 무려 72.2%의 높은 지지율로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영남 출신인 그가 광주에서의 경선 1위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며 동서통합의 가능성을 알렸다. 그 후 60%까지 치솟던 지지율은 ‘민주대연합론’을 내세우며 김영삼이 부산을 방문하면서 하락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의 비리가 터지면서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월드컵 4강 열기에 정몽준 후보가 뜨면서 20%대까지 떨어졌다. 그해 11월 초 정몽준 국민통합 21 후보에게 여론 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를 제안하여 거기서 승리하면서 단숨에 이회창 후보를 앞지르기 시작하였고, 정몽준 국민통합 21 대표가 선거 전날 저녁에 갑자기 노 후보의 지지를 철회했어도 대세는 바꾸지는 못했다. 노 후보는 유효표의 48.9%를 얻었고, 46.6%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사대 외교에 대한 자주외교의 승리이고, 기득권세력에 대한 서민 대중의 승리였으며 흑색선전과 폭로전에 대한 정책선거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7만 명에 이르는 ‘노사모’의 자원봉사, 미디어·인터넷을 이용한 선거운동, 희망돼지 저금통으로 표상되는 국민의 자발적 후원금 등 그가 선보인 선거운동은 자금과 조직, 지역주의라는 낡은 방식에 의존한 이회창 후보의 선거운동과 크게 대비되었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노 대통령이 총선과 관련하여 “국민이 열린우리당을 지지해 줄 것을 기대한다.”라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되었는데, 얼마 전에 총선을 앞두고 윤 대통령은 정책설명회라는 명목하에 전국을 돌며 국민회의 선거운동을 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억울한 측면이 있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기각함으로써 정지되었던 대통령 업무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노 대통령은 국가보안법폐지, 사립학교법·언론관계법·과거사진상규명법 실시, 부동산 가격안정을 위한 부동산세 신설, 미국으로부터 한반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의 개혁조치를 시도하였지만, 개혁정책은 보수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부동산세를 올리는 정책에도 불구하고 집값이 치솟자 서민들이 등을 돌리면서 지지율이 더 떨어졌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분단 이후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걸어서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지역으로 들어가 김정일 국방위원장하고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 이산가족 상봉확대, 서해 공동어로수역 추진, 해주경제특구 설정 등 남북경협확대와 백두산관광실시를 위한 백두산-서울 직항로 개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성과를 담았다.
2008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후 고속철도를 타고 고향인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로 내려와 하천에서 직접 쓰레기를 줍고 습지인 화포천 환경정화 활동을 벌이면서 봉하마을의 주변 환경개선에 주력하였다. 주민들과 함께 작목반을 만들어 재배한 노무현표 ‘봉하오리쌀’이 불티나게 팔리고, 봉하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하루 최고 1만 명이 넘어서면서 김해지역에서 최고 관광지로 떠올랐다.
역대 대통령 중에 고향으로 내려온 최초의 대통령이 된 노무현 대통령의 비운의 서막은 대통령이 된 이명박이 검찰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비리를 캐면서 뇌물로 받지도 않은 "고급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등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망신주기 수사를 하니까 자존심이 강한 노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새벽, 컴퓨터에 유서를 써놓고 사저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까지 하시고, 고향에 내려와 초야에 묻혀 조용하게 살겠다는 사람을 이렇게 한 장본인은 어떠했는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이것저것 죄를 짓고 감옥에 갔다가 얼마 전에 특별사면을 받고 나오지 않았던가. 참으로 못나고 나쁜 사람이다.
필자가 이곳을 처음에 왔을 때는 산소가 있는 옆으로 복분자나무가 그대로 있었고, 부엉이바위에는 모방범죄를 막는다면서 경찰이 밧줄을 쳐놓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지금은 묘역 중심으로 널찍하게 공원을 만들어 많은 사람이 찾아와 참배하고 생가를 둘러보면서 쉬었다 갈 수 있게끔 충분한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 남매는 봉하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복집에 들러 복지리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아우네 집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아우하고 소주를 마시면서 동기간의 정을 나누며 경남 진영에서의 첫 번째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약 한 시간 거리인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양산의 평산마을을 여행하기로 하였다. 마을 입구에는 보수단체에서 나온 사람들인지 몰라도 몇 명이 모여 있었는데, 전에처럼 확성기로 시끄럽게 떠들고 욕을 하지는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몇 달 며칠 동안 허구한 날을 문 전 대통령을 괴롭힌다고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못 살게 했는데도 그런 짓거리를 못하게 막아야 할 이 정부는 손 놓고 멀리서 지켜보거나 부추기지는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도록 평산마을 온 동네를 시끄럽게 했다. 우리가 그 동네 입구를 지날 때는 조용한 것을 봐서는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평산마을은 저 멀리는 영축산 줄기가 감싸고 있고, 좌측으로는 통도사의 나지막한 동산의 소나무밭을 경계로 하고 있다. 마을이 있는 언덕배기에 크고 작은 집들이 몇 채 있는데 좌측에 있는 집이 문 전 대통령의 사저라고 한다. 우리는 먼저 평산책방을 들러 책방을 둘러보다 보니 문 전 대통령이 추천한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라는 책이 눈에 띄어 집어 들었고, 누님은 시집을 하나 사 들고 나와서 다 같이 차 한 잔을 마셨다. 문 전 대통령을 만나려면 오후 4시쯤 책방에 나오신다면서 시간을 맞춰 방문하면 문 전 대통령을 만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정보를 몰랐기 때문에 안타까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차를 마시고 동네 한가운데로 나 있는 길을 걸어 나오니 마을회관이 있고, 큰길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니 우측으로 문 전 대통령의 집이 보였다. 거기까지가 우리가 갈 수 있는 한계다. 큼직한 바리케이드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로막고 있고, 초병이 사람의 진입을 막았다.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2017.05.~2022.05.)을 역임한 문재인 전 대통령은 1953년 경남 거제의 피난민 가정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원래 함경남도 흥남에서 살았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950년 ‘흥남철수’ 때 고향을 떠나 거제 피난민 수용소로 내려왔다가 거제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 문 전 대통령은 태어나서 초등학교 다닐 때쯤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부산으로 이사와 7살 때 ‘사하라’ 태풍으로 판잣집 지붕이 날아갔다고 했다. 가난한 형편에도 부산의 명문인 경남중·고등학교를 들어갔지만, 술과 담배를 하다가 유기정학을 맞기도 하였다. 문 대통령 본인이 중·고 시절에 ‘문제아’였다고 할 정도로 사회의 불평등에 불만이 많았던 문 전 대통령은 1년 재수를 하여 경희대 법대 4년간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재학 중인 1975년 유신 반대투쟁이 본격화하자 총학생회장 대행으로 반대투쟁에 앞장서서 이끌다가 징역 10월의 선고유예를 받고 풀려났으나 강제징집되어 특전사에서 군대생활을 하였다. 1978년 군을 제대하고 복학하려니 이미 제적된 상태라 복학을 못하고 절에 들어가 고시공부를 하던 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피격당한 후, 서울의 봄이 오자 다시 복학하여 학원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투쟁 중에 2차 시험을 보았고,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발표한 5월 17일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된 유치장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사법연수원에서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데모 전력 때문에 판사를 지망했어도 판사가 되지 못했다. 결혼은 사법연수원 시절에 대학 때 만났던 김정숙 여사와 결혼하여 모친이 계신 부산으로 낙향했다. 1982년 문 전 대통령은 연수원 동기 소개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뗄 내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노무현 정부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18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19대 대선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재임기간 동안 남북관계 개선에 힘써 3차례의 정상회담을 열었고, 평창동계올림픽의 원만한 개최, 임기 중반부터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위기관리를 적절히 했으며 소득주도성장으로 경제상황도 그런대로 잘 나갔다. 2018년 미국타임지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100인’에 선정될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다만, 부동산가격의 급상승으로 임기 후반에 서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모든 부분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던 대통령은 문 대통령 말고는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지금처럼 검찰을 앞세워 압수수색으로 겁주고, 모든 걸 해결하려는 잘못된 세상이 아니라 가장 민주화되고 자유롭게 살았던 세상은 역대 대통령을 통틀어 문재인 전 대통령 시절만큼 좋은 세상은 없었지 않았나 싶다.
평산마을을 뒤로하고 우리는 통도사로 이동했다. 통도사는 우리가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가는 도중에 잠깐 들렀다 간 후, 이번이 두 번째 여행이다. 양산시 하북면에 있는 통도사는 해발 1,050m의 영축산 상봉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남쪽 줄기에 신라 선덕여왕 15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해인사,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3대 사찰로 불리고 있다. 특히 자장율사가 당나라 구법 중에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 및 경책을 금강계단에 쌓은 뒤 봉안하고 절이름을 통도사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절의 대웅전에 다 있는 부처가 통도사에는 없다.
통도사 입구에서부터 일주문까지는 울창한 노송림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여기를 찾아 걷는 이로 하여금 여유와 마음의 평화를 주어서 기분이 좋아진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눈에 띄는 것들이 대부분 국보나 문화재들이어서 불자를 떠나 일반인들에게도 새롭고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요즘에 절에는 비록 다니지 않더라도 아침·저녁으로 반야심경과 천수경 불경 책을 눈으로 보지 않고 암송하고 있는데, 이처럼 아주 큰 절에 와서 여기저기를 둘러본다는 것 자체가 부처님의 은덕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 절은 젊은 시절에 왔다가 이렇게 칠십이 훨씬 넘어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롭다. 누님은 가족의 건강을 축원하는 글을 국화 꽃 속에 꽂았다. 필자는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인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을 세 차례 암송하면서 조상님의 해탈과 경전에 더 정진할 수 있게끔 용기를 달라고 했다.
늦은 점심은 통도사 앞에 있는 식당에서 한정식으로 했는데 반찬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오고, 시장기가 있어서인지 맛있게 먹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아직 시간이 있어서 우리는 진영으로 이동하다가 집으로 가지 않고,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에 들렀다. 주남저수지는 말로만 듣고 TV에서 화면으로 보았지만, 이렇게 직접 와 보기는 처음이다. 저수지 둑방으로는 잘 핀 억새가 춤을 추듯이 한들거렸고, 가득 찬 물 위로는 때 이른 철새가 많이는 아니지만 더러 보이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주남저수지 둑방길을 걸으면서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느꼈다.
주남저수지는 창원시 의창구 동읍과 의창구 대산면에 걸쳐 있는 면적이 약 898만㎡ 되는 관개용 대저수지로서 전국에서도 이름난 배후습지성 호수이다. 경상남도의 곡창을 이루는 동읍평야와 대산평야의 광활한 농토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지금은 동읍 용산리에서 동서로 쌓은 제방에 의하여 남북으로 2분 되어 북쪽은 산남저수지가 있고, 남쪽은 주남(용산)저수지가 있는데, 주남저수지 남쪽 끝으로 동판저수지가 있어 이를 통틀어 주남저수지라고 부른다. 주남저수지는 잉어, 붕어 등 담수어의 낚시터로 유명하지만, 고니를 비롯해 청둥오리, 쇠기러기, 왜기러기 등 겨울철 철새 도래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여행의 마지막 아침을 맞는다. 이것저것 아침 식사를 든든하게 먹고 집을 나섰다. 진영에서 가볼 만한 곳을 찾아보다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화포천습지’의 환경정화를 위해서 애쓰셨다는 얘기를 듣고 거길 가보고 싶었다. 아우네 집에서는 정말 가까운 거리여서 금방 갔다. 화포천을 찾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우리는 주위를 한 번 돌아볼 욕심으로 그곳을 찾았지만, 지난번 홍수로 주변 길이 물에 파묻혀 얼마쯤 가다가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오는 길에 남쪽지방이고, 습지이다 보니 아직 뱀이 동면하러 들어가지 않고 길가 구멍에서 톡 튀어나오는 바람에 뒤따라오던 여자들이 놀라기도 하였다.
우리는 원래 이번 여행에서 마산까지 갈 계획은 없었으나 서울로 가는 ktx 열차가 4시 반 차여서 시간이 충분히 있어 마산어시장을 구경하러 갔다. 시장은 어마어마하게 컸지만,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아 썰렁해 보였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시장 안에 있는 '돌섬횟집'으로 들어가 큼직한 광어와 잔잔한 전어 등을 시켜 반주도 한잔하면서 먹었지만, 아침을 먹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더 이상 먹지 못하고 많이 남겨야 했다. 그래도 시간은 남았다. 우리는 다시 진영으로 와서 시장 구경을 했다. 무겁지만 이것저것 사 들고 조용한 찻집이 있다고 해서 찻집으로 이동하여 주인의 승낙하에 과일도 깎아 먹고 차도 마시면서 진영 여행에서의 아쉬움을 달래고 아우와 석별의 정을 나눴다.
2024년 10월 22일부터 2박 3일간의 경남 진영으로의 가을 여행은 이렇게 끝나가고 있다. 그동안 바쁜데도 휴가까지 내어 우리를 위해 여기저기 운전하면서 데리고 다닌 막내아우한테 너무 고생이 많았다는 얘기와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기면서 건강하게 잘 있다가 또 만나 뵙기를 소망한다.
※참고한 글: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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