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을 가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24. 4. 23. 02:14

 

이 여행은 원래 4년 전에 갔다 와야 할 여행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가지 못하다가 코로나가 어느 정도 풀리고 갈려고 하니 어느새 나이가 칠십이 훌쩍 넘어서 여행길에 올랐다. 왕복 30시간을 넘게 비행기를 타는 것도 문제지만 패키지여행이라는 것이 항상 빡빡한 여행 일정이라서 과연 체력이 뒷받침을 해줄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그래도 모든 일정을 잘 소화하고 집으로 와서 지금 며칠 동안은 몸을 추스르고 있는 중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날씨보다 더 따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옷을 얇게 입고 갔는데 가는 날만 빼놓고는 매일 비가 내리는 데다가 기온도 햇볕이 나지 않으면 10이하로 뚝 떨어져 한기를 느껴야 했다. 그런데도 잘 버텼었는데 귀국 하루 전에 하루 종일 비를 맞고 여행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몸이 으스스 춥다고 느껴지더니 콧물이 나오기 시작하여 콧물약을 먹는 중에 몸살이 나서 다시 약을 바꿔 먹고 있는 중이다. 몸이 좀 나아지면 보고 느낀 것을 글로써 남기려고 하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을 빠져나가자 공항 옆으로는 우리나라의 갈대와 같은 식물들이 길가로 많이 보였다. 오래도록 마음에 두었던 스페인에 와서 이렇게 버스를 타고 도로를 달린다는 것이 꿈만 같이 느껴진다. 정신이 똑바로 있고, 내 발로 걸어서 다닐 때 여행도 다니는 것이지 그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여행을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가 없다. 그래서 이번 여행이 더 소중한 여행인지도 모른다. 좀 더 가다 보니 그리 크지 않은 야산에 앞쪽으로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고 뒤쪽으로는 조그만 흰 상자를 포개놓은 것 마냥 3, 4층 규모의 여러 조각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공원묘지라고 한다. 이 공원묘지에는 스페인에서 꽤 유명하였던 인사들도 이곳에 잠들어 있을 만큼 잘 알려진 공원묘지이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어서 동양 사람들처럼 조상을 잘 섬기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몬주익 언덕 하면은 황영조 선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을 할 때 우리나라의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 언덕에서 힘을 내어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게 되었는데, 이 고개에 기념석이 있을 정도로 황영조 선수가 우승을 하는데 전환점이 된 고개이기도 하다.

 

그럼 본격적인 스페인 여행을 하기 전에 스페인의 인구와 면적이 얼마나 되는가를 알아보자. 스페인은 유럽의 남서쪽 끝 이베리아반도에 속한 나라이고, 서쪽으로는 포르투갈, 북쪽으로는 프랑스에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길게 지중해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의 모로코와 마주하고 있다. 수도는 마드리드이고 마드리드에는 약 680만 명이 살고 있고, 우리가 첫 번째로 여행할 바르셀로나에는 약 570만 명이 살고 있다. 2024년도 현재 스페인의 전체인구는 우리보다 약간 적은 4,750만 명이고, 면적은 남한의 약 5배 정도 큰 506이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서 바르셀로나에서의 첫 관광지가 가장 번화가인 ‘람블라스 거리였다. 멀리서 봐도 잘 보이도록 높게 세워놓은 ‘콜럼버스’ 기념탑이 한눈에 들어왔다. 콜럼버스는 원래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주로 스페인에서 탐험가로 활동을 하면서 1492년에 에스파니아의 여왕 이사벨라의 도움을 받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으로 스페인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곳에서 좌측으로 길 머리를 돌려 올라가 보면 가우디 가로등으로 유명한 레이얄 광장이 나오고, 인도에는 길을 걷는 사람들로 길바닥이 보이질 않을 정도다. 바르셀로나 시민들과 세계 관광객들이 이 거리로 다 몰려서 같이 걷는 것 같다. 언제 다시 오겠는가 싶어서 여기저기 건물도 보고, 같이 걷는 사람들의 표정도 살피면서 되도록 여유 있게 걸어서 바르셀로나에 온 기분을 내보려고 했다. 하지만 여건은 그럴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서 한 시간 가까이 이동을 한 듯하다. 지형이 조금 있는 곳인데 나무들이 이상한 흙더미에 올라가 있는가 하면 돌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반 동굴 속으로 사람들이 들어가기도 한다. 바로 여기가 구엘공원이다. 여기서 밑을 내려다보면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엘공원은 가우디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자연과 인간을 잘 연결해 주도록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아주 많이 담긴 곳이다. 안토니 가우디는 벽과 천장의 곡선을 중시하는 건축가이며 섬세한 장식과 색채를 사용하여 미로와 같은 구엘공원, 구엘교회의 제실 및 사그라다 파밀리성당(성가족성당) 등의 역작을 남기기도 하였다. 구엘공원은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차로 다시 3~40분 이동하여 성가족성당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유럽여행을 해보면 대체로 성당 투어가 참 많다. 우리나라에서의 관광지가 절이 많이 있는 것처럼 유럽 쪽에서는 어느 나라를 가든 성당을 많이 돌아본다. 성가족성당의 규모는 가로가 150m, 세로가 60m이고 철탑 높이가 170m에 이른다. 스페인에 와서의 첫 번째 성당 투어인데 전에 유럽에서 보았던 성당과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하나하나 눈여겨보면 오밀조밀하고 섬세하게 건축한 것은 다른 성당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찬란하다. 아무래도 가우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가우디가 31살에 비야르가 설계한 디자인을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여 1926년 죽는 날까지 43년간을 오롯이 성당 짓는데 열정을 쏟아부었지만 완공하지 못하고, 착공한 지가 130년이 되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그의 제자들이 성당을 짓고 있다. 가우디 사망 후 미완성되었던 부분과 1935년 스페인 내전뿐만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 그 외에 자금 부족으로 중단되었던 건축이 입장료 수입으로 1953년부터 공사가 진행 중이고,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공할 예정이다. 성당 안쪽을 돌아볼 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성경의 주의 기도문중의 일부분이기는 해도 여러 나라 언어로 쭉 써놓은 동판 조각물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의 한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비록 신자가 아님에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가족성당은 2005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스페인에 와서 처음 만나는 성당이 성가족성당인데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으로 본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의 유명한 또 다른 건축물로는 1984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카사밀라(Casa mila)를 얘기할 수가 있는데, 이 건축물은 아쉽게도 자세히는 보지 못하고 차를 타고 가면서 창 너머로 슬쩍 보았다.

 

바르셀로나에 와서 첫날 저녁을 맞이했는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내 야간 투어를 가자고 하는데도 전날 밤 비행기 내에서 고단한 밤을 보내서 그런지 간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서 그나마 바르셀로나에서 편안한 잠을 자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한 시간 거리의 몬세라트로 출발하였다. 어느 정도까지는 버스로 올라가다가 전차로 바꿔 타고는 꽤 높은 산등성이가 있는 데까지 올라가서야 종착역이었다. 올라오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산도 바위산이고 봉우리도 둥글둥글한 것이 꼭 튀르키예의 카파도키아에 있는 버섯바위처럼 모양이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산 능선 쪽으로 쭉 퍼져있다. 역에서 내려서 전망대까지는 사진을 찍으며 여유 있게 걸어도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전망대 정상에는 큼직한 십자가가 자리 잡고 있고 시원스럽게 멀리까지 조망할 수가 있었다. 몬세라트에서 유명한 건축물로는 버섯바위 밑으로 바짝 부쳐서 지은 성당이었다. 지금이야 교통편이 많이 좋아져서 다니기에 불편함이 덜하겠지만 오래전에는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상당한 수련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몬세라트에 와서 좀처럼 보기 드문 바위산을 보고 간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버스로 4시간을 달려서 발렌시아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여행하는 코스가 스페인의 동쪽 해안을 따라 지중해를 보고 여행하는 것이어서 바다도 보고 산과 들도 보면서 스페인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보니 스페인에는 논이 없고 전부 밭이고, 밭에는 주로 올리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으며 그다음으로 눈에 많이 띄는 것이 오렌지 나무와 레몬이 보이고, 발렌시아 얼추 다 와서는 살구나무도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이렇게 스페인의 동쪽 해안 쪽으로는 밭에 곡물 종류보다는 과실수를 많이 심어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국토가 넓어서 그런지 농촌 지역에서도 사람들의 표정에서 여유가 있어 보였고 찌들어 보이질 않았다.

 

발렌시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버스를 타고 5시간을 달려 그라나다에 도착하여 아름답기로 소문난 헤네랄리페 정원을 둘러보고, 이슬람 건축의 최고 걸작이자 그라나다의 상징인 알람브라궁전을 관광하였다. 먼저 헤네랄리페 정원은 물의 정원이라고도 부르며 그라나다 왕의 여름 별궁으로서 14세기 초에 조성되었다. 흰색의 별궁을 가다 보면 물과 나무와 분수가 어우러져 인위적으로 가꾸기는 했지만, 그림과 같은 정원이 나온다. 세로형 정원에 수로를 설치하여 시원한 맛을 느끼게 하고, 진초록의 사이프러스 터널을 통과할 때는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이 궁전은 알람브라궁전보다 50m가 더 높은 지역에 위치하여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을 사방으로 둘러볼 수가 있다. 여기는 왕가의 휴양지이며 왕이 업무를 보는 곳이 알람브라궁전이라면 헤네랄리페 정원은 왕이 쉴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다. 이 별궁은 그라나다 무하마드 3세에 의해 축조되었고 나스르 왕조시대인 1319년 아블왈리드가 확장하였다. 스페인 지배하에서는 후작의 소유가 되었다가 다시 국가에서 인수하여 역사적 기념물로 보존하게 되었다.

 

 

알람브라궁전은 해발 740m의 고원 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너비가 205m에 서북쪽과 동남 방향으로 건물이 뻗어 있으며 면적은 142에 달한다. 이 왕궁은 붉은 철이 함유된 흙으로 지어서 ‘붉은 성을 뜻하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담으로는 견고하게 쌓아진 옹벽에 13개의 타워가 있으며 밑으로는 다로 강이 흘러서 그라나다 지역을 양분하고 있다. 9세기에 군사 요새로 지어졌다가 왕실의 거처가 되고, 13세기 중반에는 그라나다의 왕궁이 되었다. 1492 년 스페인의 여왕인 이사벨라가 이 성을 정복하기 전에는 이슬람 문화권인 아랍인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정복 후에는 기독교문화권으로 성도 점차 바뀌게 되었다. 16세기 초 카를로스 1세가 겨울 궁전을 허물어 버리고 르네상스 양식으로 궁전의 건축양식을 수정하였고, 18세기 초에 펠리페 5세는 전각과 주위 방을 이탈리아식으로 바꿔 이슬람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손상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오랜 기간 여러 피해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알람브라궁전은 무어 예술의 극치를 잘 나타내고 있는 곳이다. 대부분의 건물은 폐쇄적인 건축에서 벗어나서 작은 전각도 중앙을 향해 드러나도록 하였고, 외부는 굴곡을 없애서 평평하게 하였지만, 내부에는 웅장함을 가미하기 위해 고도차이를 이용하였다. 게다가 안쪽으로는 대리석 기둥과 아치형의 건물이 보이기도 한다. 투명하게 드러나는 천정도 햇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통하게 하여 전체 공간을 밝고 우아하게 하였다. 파란, 빨강, 금빛 노란색이 잘 어우러져 시간과 빛의 노출 정도에 따라 달라지게 한 것도 독특하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다. 그라나다에서 아침을 먹고서 버스 편으로 2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이 스페인의 론다라는 지역이다. 산을 넘어올 때는 아직도 하얀 눈이 산기슭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지대가 높은 지역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는 스페인 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게 하는 것이 투우인데 가장 오래된 토로스 투우장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론다의 신·구시가지를 연결해 주는 엘타호 협곡의 누에보 다리를 관광하였다. 론다에 있는 누에보 다리는 1793년에 마르틴 데 알데우엘라가 책임자가 되어 40여 년의 공사 끝에 완공한 과달레 빈 강의 120m 협곡에 세워진 다리이다. 이 다리는 에스파냐에서 오래된 다리로 사진 촬영의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현재에도 전 세계의 사진작가들이 선호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스페인을 소개하는 세계 각국의 관광안내책자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관광 명소이며, 론다의 이 다리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론다에서 다시 버스에 올라 한 시간 반을 이동하여 미하스에 도착하였다. 미하스는 산 중간에 있는 마을인데 벽을 하얀 색깔로 칠하여 ‘하얀 마을’로 이름이 붙여졌다. 아기자기하게 하얀 집들로 이루어져 사는 동네라 그런지 깨끗하고 조용하였다. 일본인들이 정년퇴직하고 노년에 이곳으로 이민 와서 많이 산다고 해서인지 일본 관광객들은 여기가 여행의 필수 코스라고 한다. 미하스는 1953년까지만 해도 전화가 개통되지 않았으며 집들도 모두 판잣집이었다. 1960년대 석면공장이 들어오면서 실업이 감소하고, 호텔이 처음으로 생기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태양의 해변에 속하는 미하스도 관광의 붐을 이루면서 여러 마을이 새로 생기었다. 해안 도시인 미하스는 아열대 기후로 겨울이 따뜻해 살기 좋으나 하절기는 매우 더운 편이다.

 

미하스에서 차로 두 시간 가까이 달려서 스페인의 남부지역 끝에 있는 지브롤터 입구에 도착하였다. 스페인과 영국의 지브롤터와의 국경선은 비행장의 활주로를 경계로 하기 때문에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는 통행이 중단되기도 한다. 영국령인 지브롤타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스페인에서 영국령으로 나라가 바뀌니까 출입국관리소에 들러 여권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게다가 여기서는 유로를 못 쓰고 영국 파운드를 사용하니까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중형버스로 투어를 했는데, 전망대까지는 좁은 길을 한참 올라가야 426m의 정상이 나온다. 산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서 동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서쪽은 다소 완만하여 동굴도 있고 자연생 원숭이도 꽤 많이 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차편은 큰 차는 운행을 할 수가 없어도 적은 중형버스까지는 정상까지 올라갈 수가 있다. 전망대에 올라가 보면 북쪽은 스페인 땅이 가까이 눈에 들어오고, 지브롤타 해협을 기준으로 하여 오른쪽은 대서양이고, 좌측은 지중해라서 한 장소에서 일몰과 일출을 다 볼 수 있는 데가 여기이고, 그 모습이 아주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는 전망대에서 중간쯤 내려오다가 동굴로 들어가 각종 조명으로 시각효과를 높인 석회암 동굴 구경을 하였다. 산에 나무는 주로 유칼립투스가 많이 눈에 띄는데 큰 것들은 40m 이상 되어 보였다. 지브롤타 전 지역이 면세지역이라서 다른 지역보다 물건값은 싸다고 하니 부족한 것은 사 갖고 가도 된다.

 

아프리카를 가기 위해서는 타리파항에서 탕헤르로 가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짧은 코스이지만, 우리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타리파에서 세우타로 돌아가는 배를 타야 했다. 세우타 항은 아프리카 지역에 있는데도 모로코 영토가 아니고 스페인 땅이라 배에서 내려 육로로 한참을 걸어가서야 입국 수속을 밟을 수가 있었다. 모로코에 오니 컴컴한 밤인데 또 모로코에서 나온 버스를 바꿔 타고 테투안까지 한참을 가서야 호텔에 들어가 모로코에서의 첫날밤을 보낼 수가 있었다.

 

모로코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게 되면 길게 첫 번째 나오는 나라이다. 북동쪽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고, 서쪽은 대서양과 연결된다. 동쪽 지역은 알제리와 국경을 길게 같이 하고 있다. 면적은 442,300㎢로서 우리 남한 면적보다 약 4.5배가 더 크지만, 인구는 우리보다 적은 약 3,800만 명이 살고 있다. 기후는 대륙성, 사막성, 지중해성 혼합 형태의 기후라서 변화가 있는 편이다.

 

모로코 테투안에 와서 아프리카에서의 첫 아침을 맞는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어 보니 모로코의 테투안 시내의 사람 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깜깜한 밤에 아프리카의 모로코 땅에 들어와 이동하다 보니 주변을 살피지 못했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 쉐프샤우엔까지는 한 시간 남짓 온 듯하다. 쉐프샤우엔은 이슬람교의 성지이기도 하며 리프 산맥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스페인에서 쫓겨난 무어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오랫동안 비이슬람교도에게 폐쇄되어 온 쉐프샤우엔은 1920년 스페인이 정복하여 1956년에 모로코 왕국에 반환하였다. 이 도시에는 아직도 12개의 이슬람 사원이 남아있으며, 모로코에서는 볼 수 없고 유럽 남부에서나 볼 수 있는 둥근 타원 지붕의 하얀 집들이 그림 같은 풍광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 들어오면 집들은 흰색과 하늘색 물감으로 잘 칠하여 멀리서도 확 눈에 띄었고, 모로코에서 가장 예쁜 마을이라고 하여 우리는 아프리카에 와서 여기가 첫 번째 관광지가 되었다. 쉐프샤우엔에서 눈여겨볼 붉은색의 건물이 마을 중심부에 있는데, 이곳은 모로코의 과거를 상징하는 박물관으로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쉐프샤우엔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쉐프샤우엔에서 버스로 4시간을 달려서 온 곳이 금빛의 문이 있고 호화롭고 장대한 왕궁이 있는 페스였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모로코의 산과 들을 거쳐서 왔는데 스페인에 이어 이곳도 땅은 비옥해 보였다. 경작지가 논은 없고 거의 밭이었는데 스페인에서처럼 올리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으며, 스페인 동쪽 지중해 연안으로 내려올 때 보지 못한 소와 양을 기르는 목축 농장도 흔하게 눈에 띄었다. 밭에는 밀 농사를 많이 짓고 있었는데 계절이 3월 말이라 쌀쌀한데도 벌써 이삭이 올라와 있는 전형적인 농촌의 들 모습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우리가 시골에서 농사짓던 그런 밀과 보리와 비슷하지만, 키는 우리의 밀에 비해 절반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페스에 도착하자마자 왕궁의 출입문이 있는 광장을 찾았다. 왕궁광장을 돌아보고 구도시의 미로로 얽힌 메디나로 들어가려면 밥부즐루드라는 출입문이 있는데 안쪽은 초록색, 바깥은 파란색 타일로 만들어져 초록색은 이슬람을 뜻하고, 파란색은 페즈(Fes)를 상징한다고 한다. 8세기 고대도시이자 세계 최대의 미로라고 알려진 메디나는 모로코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이드리시 1세에 의해서 요새 도시로 건설되다가 자객에 의해 이드리시 1세가 암살되면서 그의 아들 이드리시 2세에 의해 완성되었다. ‘알리의 도시’ 페스의 메디나는 미로와 같은 좁은 골목에 크고 작은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어 출입문을 통해 한꺼번에 수많은 병사들이 진입할 수가 없게 계획되어 있는 데다가 진입하는 소수의 적들은 화살로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건축되었다. 이드리시 1세가 이 도시를 건설할 때 만인이 평등한 도시를 꿈꾸었기 때문에 외관상으로 보았을 때는 부유함의 정도를 알 수 없이 똑같은 창문과 출입문, 장식 없는 벽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도 수천 개의 길가로는 가죽제품과 의류, 잡화 등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오밀조밀하게 붙어서 오래 전의 찬란하였던 문화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짐작해 볼 수가 있다. 1981년에 구시장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의 수원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페스에서 조반을 먹고 다시 3시간 40분을 달려서 모로코에서 인구(375만 명)가 가장 많다는 카사블랑카에 도착했다. 1515년 포르투갈 인들이 모로코에 새 도시를 건설하고 ‘하얀 집’이라는 말이 '카사블랑카'인데 이렇게 이름 지어 불렀다. 1755년 대지진으로 도시가 많이 파괴되었다가 18세기말에 재건된 후 주로 스페인과 유럽 상인들이 정착했으며 프랑스인이 다른 유럽인보다 많아지면서 메종블랑슈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907년 프랑스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모로코에서 가장 큰 항구이자 대외무역의 전초기지로 성장하였으며 또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제일의 휴양지로 발전하여 지금에 이른다.

 

카사블랑카에 와서는 하산 2세 모스크와 모하메드 5세 광장을 둘러보았다. 하산 2세 모스크는 19938월에 해안과 육지를 연결하여 완공된 모스크로 사원의 규모는 외부까지 포함하여 약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사원이고, 모로코에서 가장 큰 모스크이며 세계적으로는 13번째 큰 모스크이다. 또한 첨탑 높이가 210m로서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모하메드 5세 광장은 왕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어진 광장인데 비둘기와 분수가 잘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로워 보였다. 주위에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은 건물들이 많이 있는데 지금은 고등법원과 전화국, 은행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카사블랑카의 하산 2세 모스크에서 1시간 반을 달려서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로 왔다. 라바트에서는 전통 아랍 기법과 현대 목조법을 가미하여 조화롭게 지은 왕궁이 있다는데 지금은 총리 관저로 사용한다고 하여 개방이 되지 않아 관람하지 못하고, 하산탑과 모하메드 5세의 묘가 있는 데를 둘러보고 시내 관광을 하였다. 하산탑은 여러 기둥 사이로 붉은 사각형의 기둥으로 된 탑을 말하는데 알모하드 왕조의 제3대 야콥 알 만수로가 12세기 말경 장대한 모스크의 건설을 시도하다가 얼마 후 죽으면서 공사는 중단되고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첨탑이다. 한 변이 16m의 정사각형으로 높이가 44m까지 올라가다가 중단되었는데 완공하였더라면 아프리카 최대의 모스크가 될 뻔했다. 이곳은 에스파냐 무어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산탑을 지나서 조금 더 가면 모하메드 5세의 무덤이 나온다. 모하메드 5세는 슐탄 벤유세프의 아들로 태어나 1912년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령을 만들면서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앞장서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563월에 프랑스로부터 모로코가 독립하자 왕위에 올라 모하메드 5세가 되었고, 그 이후에 근대국가 건설에 힘쓰다가 1961년에 죽었다. 이 묘는 1971년에 준공되었고, 건물 안 바닥에 석관이 안치된 것을 직접 유관으로 볼 수 있으며 실내장식을 아주 화려하게 꾸며서 보는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아프리카 모로코에 와서 마지막 날 밤을 보내고 있다. 내일은 새벽 2시 반에 기상하여 아침 식사를 하고 버스로 서너 시간을 달려 탕헤르까지 가서 6시 반에 타리파로 출발하는 배를 타야 했다. 원래는 10시 배를 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배가 갑자기 취소되는 바람에 앞의 배를 타지 않으면 여행 일정에 커다란 차질이 생겨 이런 난리를 친 것이다. 스페인의 타리파 항구에 도착하니 아침 8시 가까이 되었다. 여기는 스페인이어서 별도로 입국 절차가 필요하였다. 스페인에서 입국 절차를 마치고 새롭게 만난 버스에 몸을 싣고 약 2시간 반을 달려 세비야에 도착하였다. 세비야에서는 볼거리가 많았다. 세계 3대 성당 중의 하나인 세비야 대성당도 보아야 하고, 세비야에 오는 여행객들은 누구나 다 보고 가는 황금의 탑도 봐야 한다. 그뿐이겠는가. 1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마리아루이사 공원에 가서 아름다운 공원도 구경하고, 또한 스페인광장도 둘러봐야 했다.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 후에는 플라멩코 춤도 보러 가야 해서 세비야에서의 일정이 상당히 바쁜 일정이다.

 

스페인의 세비야에 있는 마리아루이사 공원 안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스페인광장이 있으며 세비야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공원이다. 즉 운하와 산책로가 잘 발달되어 있고 광장에는 분수대와 오래된 건물이 잘 어우러져 있어 시민들이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공원은 마리아루이사 공주가 1893년 산 텔모 궁전 정원의 절반을 시에 기증하면서 공주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한 세비야에서 관광객이라면 으레 가봐야 할 곳은 황금의 탑을 빼놓을 수가 없다. 과달키비르 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탑은 13세기 이슬람 시대에 지은 12각 형태의 둥근 탑으로 강 상류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이슬람 시대에 지어진 군사용 건물로는 마지막으로 남겨진 건물이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세비야 대성당은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세비야에 있는 대성당이며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성당의 규모 면에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의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영국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이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하지만 고딕 양식의 성당 중에서는 세비야 대성당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1401년 성당 참사회의에서 그 어떤 다른 성당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크게 지어 이 성당이 마무리되면 성당을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해야 한다.”라며 무조건 톨레도 대성당보다 크게 지어야 한다며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짓기 시작하여 105년 후인 1506년에 완공되어 세비야 관광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성당 종탑인 히랄다 탑은 오렌지 정원과 함께 유일하게 남은 12세기에 지어진 이슬람 사원의 한 부분이다. 17-18세기에 들어와 원래는 고딕 양식에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추가되면서 여러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세비야에서 관광지로서 가장 이름이 있는 곳은 뭐니 뭐니 해도 세비야 대성당만 한 곳이 없다. 물론 규모 면에서 세계 3대 대성당이라고 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성당 내부의 조각이라든가 조형물, 그리고 그림 등의 꾸밈이 여느 성당에서 여태껏 볼 수 없었던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소탈한 것이 마음에 닿았고, ·은 보석을 붙여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나는 것보다 훨씬 신께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세비야에 와서 정말 멋지고 훌륭한 성당을 보고 가게 되어 오래도록 세비야 성당이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오늘은 서둘러 저녁 식사를 해야 했다. 플라멩코 춤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옛날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전통 민요와 무용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는 있지만 세비야에서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이 좀 있어서 공연장에 일찍 들어갔는데 벌써 많은 관람객들이 들어와 있었다. 남의 나라 문화를 이해하는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거로 본다. 스페인 남자들은 투우를 즐기는 것을 봐서는 힘을 자랑하는 것으로 보였고, 여자는 뭐를 잘하는가 봤더니 이렇게 춤을 잘 춘다. 남자든 여자든 다들 흥이 많은 민족임을 플라멩코 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오늘도 세비야에서 플래맹고와 더불어 좋은 밤을 보내고 있다.

 

세비야에서 아침을 먹고서 거의 5시간 가까이를 달려서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에 도착하였다. 포르투갈의 인구는 약  1,020만 명으로 우리나라의 5천만 인구에 비해 많이 적은 편이다. 면적은 우리 남한보다 약간 적은 92,212이고, 기후는 대륙성과 해양성 기후의 혼합 형태이다. 위치는 동쪽과 북쪽은 스페인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해 있다. 겨울은 온난·습윤하고 여름은 비교적 기후 변화가 없으면서 건조하다. 포르투갈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동질적인 민족에 속하며 지중해 주변 민족들과 신체적 특징이 유사하다.

 

포르투갈 리스본에 와서 처음으로 관광한 곳이 로(호)시우 광장이다. 로시우 광장은 페드루 4세 광장이라고도 하며 광장 중심에는 페드루 4세 동상이 있다. 두 번째 관광지는 코메르시우 광장인데 아우구스타 거리 남쪽 끝에 자리한 개선문을 통과하면 테주(Tejo) 강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드넓은 광장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리스본에서 가장 큰 광장인 코메르시우광장이다. 과거에 누엘 1세의 리베이라 궁전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궁전광장이라고도 하며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궁전이 파괴되어 폼발 후작의 도시 계획에 의해 광장으로 재건축되었다. 광장 중앙에는 주제 1세 기마’ 동상이 서 있고, 한쪽으로는 리스본 웰컴센터인 중앙 관광안내소가 자리하고 있다

 

세 번째 관광으로는 ‘벨렘탑’이다. 벨렘탑은 테주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마누엘 1세에 의해 1515년에 외국 선박을 감시하고 통관절차를 밟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스페인 지배하에서는 정치범과 독립운동가들을 가둬 놓는 감옥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내부 관람이 가능한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제로니모스 수도원을 관람하였는데 리스본 항구 입구에 있는 수도원으로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948년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양을 개척하여 비단과 향신료가 포르투갈에 들어오자 마누엘 1세가 부를 상징하기 위해 짓기 시작한 수도원이다. 1502년에 착공하여 1672년에 완공하였으며 1755년 리스본의 대지진 속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을 정도로 탄탄하게 지어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특히 야자수처럼 생긴 기둥과 천장은 마누엘 양식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수도원 안에는 인도를 개척한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코다 가마의 석묘와 시인 루이스 바스데카 몬스의 석묘가 자리 잡고 있다.

 

리스본에서 약 1시간 40분을 달려서 파티마에 도착했다. 파티마에서는 성모 발현지로 유명한 가톨릭의 중심지 바실리카 성당을 관람하고 파티마 구시가지를 둘러보았다. 파티마 바실리카 성당에서 바실리카라는 용어는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고 규모가 크며 교황이 특별한 전례 의식을 거행하는 성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티마 바실리카 성당 또는 파티마 성당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곳은 19175월부터 10월까지 매달 13일에 3명의 목동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파티마의 기적이 일어난 후 레이리아의 주교가 신빙성을 인정하였고 바티칸의 명으로 성지로 정하였다. 1928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바실리카식 대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여 195310월에 완공하여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파티마 성당을 로사리오 성당이라고도 하는데 15개의 제단과 1952년에 설치된 대형 오르간이 있고, 성체 안치기는 아일랜드의 주요 종교작품으로 1949년에 기증되었으며, 건물 앞 거대한 광장에 성모 마리아 출현 예배당과 64m 높이의 탑이 있다.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장소라고 대리석 기둥에 표시되어 있고, 대성당 묘소에 파티마의 기적을 목격하였던 당시 세 사람의 무덤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지 순례 여행지로 성모 발현일인 513일과 1013일에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다.

 

집을 떠나 여행을 온 지가 벌써 열흘이 다 되었다. 우리와 같이 여행 온 사람 중에서 어떡하다 보니 필자가 최고령이라서 건강을 좀 걱정하였지만, 그런대로 잘 버티었다. 날씨가 우리의 여행을 시샘했는지 여행을 시작한 첫날 빼놓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가 내려서 여행의 즐거움이 좀 떨어졌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우산을 썼다 폈다를 반복하며 비를 맞고 강행군을 하다 보니 이제는 피곤하다는 생각도 들고 감기 기운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챙겨간 판피린 코프를 마셨더니 콧물이 덜 나오는 것 같다. 아무튼 며칠 남지 않은 여행을 잘 마치기를 바라며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5시간을 달려서 스페인 톨레도에 도착하였다.

 

톨레도는 6세기 초반 서고트 왕국의 수도가 된 후 1561년 스페인 왕국의 펠리페 2세가 수도를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옮기기 전까지는 수백 년간 여러 왕국의 수도였다. 톨레도는 기독교, 유대교, 이스람교 등 여러 종교를 거치면서 종교문화유적이 공존하게 되었고,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도 곳곳에서 그 유적들을 볼 수가 있다. 톨레도에서 그 유적을 보기 위해서는 톨레도 대성당이나 산토토메 교회가 있는 곳으로 가야 되는데, 그곳이 지대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몇 구간을 올라가서 도보로 걸어가야 한다.

 

톨레도에서는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인 톨레도 대성당을 관광하고 엘 그레코 걸작인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전시된 산토토메 교회를 둘러볼 예정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소코도베르 광장에서 도보로 8분 정도 걸리고, 알카사르에서는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다. 성당의 건립은 1225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난도 3세의 명에 따라 원래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고딕 양식으로 짓기 시작하여 1493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손길로 성당의 증·개축을 통하여 현재의 엄청난 규모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이 되었다. 본당 보물실에는 16세기 초 엔리케 아르페가 만든 성체 현시대가 보관되어 있는데 5천 개의 금·은 보석으로 만들어져 무게가 무려 180㎏에 높이가 3m가량 된다. 또한 성가대석에는 그라나다가 함락되는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조각품이 있고, 성물실에는 엘 그레코의 종교화와 고야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작은 미술관이라도 온 듯 여러 작품을 감상할 수가 있다. 톨레도 대성당은 198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산토토메 교회는 규모가 아주 작은 데도 많은 관광객이 오는 것은 엘 그레코가 그린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埋葬)’이라는 걸작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312년 톨레도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때 일어난 기적을 묘사한 것인데 1586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588년까지 2년에 걸쳐 그린 그림이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 출신의 유명한 르네상스 화가이고 조각가며 건축가이기도 하다.

 

톨레도에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 여정지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로 향했다. 시내 들어오다가 차가 밀리기는 했어도 시간은 한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마드리드에서는 첫 번째로 푸에르다 델 솔 광장을 관광하고 마요르 광장, 마드리드 궁전과 스페인 광장을 둘러볼 예정이고, 내일 마지막 날 프라도 미술관을 관람할 예정이다.

 

먼저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을 가보자. 메트로 1, 2, 3호선이 연결되어 솔 역에서 내리면 바로 걸어서 1분 거리에 있고, 버스도 솔 광장으로 오는 노선이 많이 있어서 교통은 상당히 편리한 편이다. 솔 광장이라고 부르는 푸에르타 델 솔은 국토의 기점에 해당하는 장소로 스페인 각지로 통하는 10개의 도로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태양의 문이라는 뜻의 푸에르타 델 솔에는 16세기까지 태양의 그림이 그려진 성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광장 한편에 소귀나무와 곰 조각상이 마드리드의 상징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솔 광장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사랑받고 있으며 이 일대는 마드리드의 옛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마드리드 왕궁까지 구시가지가 연결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교통이 편리하여 레스토랑, 백화점, 쇼핑센타, 카페, 서점 등을 찾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고 있다.

 

솔 광장 중앙에는 카를로스 3세 동상과 분수가 있는데 솔광장에 전해 내려오는 포도 이야기가 있어 잠시 얘기해 볼까 한다. 1895년 포도 농사가 풍년이 들어 포도가 넘쳐나자 스페인 국왕은 국민 모두에게 나눠주자고 명령을 하자 12월 연말에 광장에 모여 마음껏 먹었다. 그 후 1919년부터 농민들이 포도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연말 자정에 이 광장에 모여 포도를 먹는 행사를 기획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마드리드 시민들은 1231일 자정이 되면 솔 광장에 모여 시계가 종이 한 번 울릴 때마다. 포도 한 알씩 12알을 먹는다. 그 이유는 한 해가 열두 달이고 청포도를 먹으면 액운이 없어진다고 하여 아직도 이 행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마드리드 번화가에 있는 마요르 광장은 중세시대에는 시장으로 사용되던 장소였는데 펠리페 3세 때인 1619년부터 주요 행사가 열리는 광장으로 건설된 후 왕의 취임식, 종교 행사, 투우 경기, 교수형 등이 치러지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3번의 화재로 예전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19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축되었다. 직사각형의 4층 건물이 광장 전체를 둘러싸고 있고, 9개의 아치문이 광장으로 통하고 있어서 어느 방향에서든 광장으로 쉽게 들어올 수가 있다. 광장 가운데는 펠리페 3세가 말을 타고 있는 기마상이 있으며, 광장을 둘러싼 건물 1층에는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 관광안내소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매주 월요일이면 오래된 우표를 판매하는 벼룩시장이 생기고, 12월에는 크리스마스 시장도 열린다.

 

마드리드 왕궁은 9세기에 세워졌던 무슬림의 요새 자리였는데 그들이 물러나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사용하다가 1734년 크리스마스날 밤에 대형화재로 소실된 후 펠리페 5세가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하게 지라고 명을 내려서 사바티니와 로드리게스에 의해 1764년에 지금과 같은 왕궁이 건립되었다. 원래는 스페인 왕의 공식 거처이지만, 현재는 공식 행사에만 사용되고 실제로 거주하지 않는다. 사방 150m의 왕궁 안에는 2,800개의 방이 있는데 50개의 방만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그중에서 옥좌의 방가스파리니 방이 로코코 양식으로 정교함과 화려함이 더해져 호화스러움이 극치를 보여준다고 한다. 우리는 실제로 궁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겉모습만 보고 왔다.

 

마드리드의 스페인광장은 에스파냐광장이라고도 하는데 마드리드의 최고 번화가인 그랑비아 거리의 시작점이 되는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세르반테스 사후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탑 앞에는 ‘돈키호테’ 소설에 나왔던 주인공인 돈키호테는 말을 타고 있는 것 같고, 산초는 당나귀를 타고 있는 동상이 있어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소설을 더 빛내주고 있는 듯 보였다. 우리는 광장을 둘러보고 시간이 좀 있어서 솔광장 앞에 있는 백화점에 들러 건조 무화과와 손자들에게 줄 과자를 사서 나왔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와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다. 장기간의 여행이고 비 오는 날이 많아져서 기온이 10이하로 떨어질 때가 많다 보니 감기를 조심해야 했다. 어제부터 몸이 으스스하더니 아무래도 감기가 오는 듯하다. 콧물이 닦아도 연이어 나와서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나서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스페인에 와서 마지막 아침을 맞았다. 오늘도 또 비가 내린다. 이번 여행 중에 첫날만 비가 오지 않고 여태껏 하루도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없다. 비가 내릴 때는 기온이 뚝 떨어졌다가 햇볕이 나면 다시 기온이 죽 올라가서 기온 차가 심한 편이다. 이렇게 비가 자주 내리는데도 스페인 남부지방은 가뭄이 심하다고 가이드 선생께서 하는 얘기를 들었다. 아침을 먹고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마지막 여행지로 향하였다.

이번에 여행할 곳은 숙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이다. 국립미술관이고 세계 3대 미술관이라 그런지 입장료도 꽤 비싸게 받는 것으로 보인다. 너무 일찍 온 탓인지 처음에는 사람들이 없다가 입장 시간이 가까워지자 우산을 쓰고 길게 줄을 서야 했다. 우리와 같은 여행객들이 많이 온 듯하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두 남자의 조각상이 나오는데 이것까지만 사진 촬영이 허용되고 그 외에는 전혀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간단히 이 박물관에 대해 얘기를 해보면 스페인 회화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미술의 걸작품을 비롯해 유럽의 다양한 회화작품들도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건물은 1785년 카를로스 3세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게 시켜 자연과학박물관으로 설계한 것이고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짓는 중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819년에 완성되어 왕립회관으로 공개되었다. 왕궁과 에스코리알에 있는 그림을 모아 이곳의 소장품을 확장시킨 이사벨 2세가 추방된 후 1868년에 프라도 국립미술관이 되어 지금에 이른다. 소장품들은 합스부르크가와 부르봉가의 군주들이 수집한 미술품으로 이루어지다가 20세기에 부속건물이 지어지고 수집품도 점점 늘어나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프란체스코 데 고야, 호세 데 리베라 등의 작품 등을 소장하게 되었다. 좋은 작품들이 많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많이 먹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상식도 떨어지고, 식견이 부족하여 무엇을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다녀온 지가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이 두 작품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걸 봐서는 프라도 미술관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반면, 루브르박물관은 사진 촬영이 가능하여 그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에둘러 둘러대고 싶다.

 

이제는 비행기 타고 가는 것만 남았다. 물론 열대여섯 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지만, 이렇게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까지 공식적인 모든 여행은 끝났다. 고르지 못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 일정이 아무런 사고 없이 여행을 마치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우리를 위해 불철주야 고생이 많으셨던 가이드 조 선생께 우선 감사드리고, 그리고 현지에서 우리를 위해 수고가 많으셨던 세 분 가이드 선생께도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12일 동안 이번 여행을 함께한 모든 여행 동지들께도 고마웠다는 말씀을 드리고, 여건이 허락된다면 또 여행하다가 어디서든 만나 뵙기를 소망한다.

 

참고한 글: 다음 백과, 내어버 지식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