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충남 온양의 외암리 마을을 가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20. 10. 22. 11:35

한동안 날씨가 전형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졌었는데 충남 온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외암리 민속 마을을 가려고 하니 오늘 따라 날씨가 우중충한 것이 안 좋다. 그렇다고 마음먹은 것을 취소할 정도의 날씨는 아니어서 운동도 할 겸 안양역까지 한 20분 걸어가서 신창 가는 전철을 탔다. 급행이면 전철 타는 시간이 다소 얼마는 줄어들었을 텐데 한참을 기다려야 해서 일반 완행을 탔더니 온양까지 무려 1시간 40분이나 걸렸다.

 

온양으로의 여행은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인 지난 연말에 온천욕을 하러 갔다 온 이래 근 1년이 다 되었다. 그 후 외암리 민속 마을을 가기 위해 마누라와 같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또 온양에 오게 되었다. 차를 갖고 오지 않아서 외암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시내버스를 이용해야 했는데 지리를 잘 모르니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한테 자꾸 물어봐야 했다. 외암리 가는 버스를 여기서 타느냐고 몇 사람한테 물어봐도 다들 모른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우리가 있는 이 승차장이 아니고 시장 동쪽입구의 축협 앞에 있는 승차장이라고 하여 길을 건너서 찾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버스가 오지 않아 어느 아줌마한테 외암리 가는 버스를 묻자 길 건너 유엘시티 앞의 정거장으로 가라고 한다. 다시 그리로 승차장을 옮겨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21번 마을(마중)버스가 와서 승차하기 전에 외암리 가느냐고 물어보니 가지 않는다고 한다. 인터넷 길 안내에는 가장 빨리 가는 버스가 22번으로 나오고 17.17-1, 21번 등 여러 버스가 나오는데도 잘 못 알려주었다. 이 버스들이 가긴 가도 몇 시간 만에 한 번 가는 것을 가장 먼저 올려놓아서 초행자들에게 많은 불편을 초래하게 했다. 유엘시티에서 외암리를 가려면 100번이나 101번 시내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 버스노선도 자주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왔다 갔다를 몇 번 반복하고 헤매다 보니 괜히 아까운 시간을 길바닥에서 1시간 넘게 허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할 수 없이 택시를 탔다. 거리는 8km 가까이 되는데 시간은 20분 남짓 걸렸다.

 

어렵게 도착한 외암마을은 우리가 어렸을 때의 고향 시골마을과 비슷하여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멀리서도 기와집과 초가집이 뒤섞여 있는 마을풍경이 평화롭게 보인다. 특히 마을을 감싸고 있는 뒷산이며 마을 옆과 앞을 흘러가는 개울은 우리가 근심·걱정 없이 뛰어놀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참고로 입장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이고 입장료는 어른이 2,000원, 어린이가 1,000원이며 65세 이상은 무료이다.

 

 

 

외암리 마을은 이조 후기의 학자 이간(李柬:1677-1727)선생의 호가 외암(巍巖)이었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외암 선생은 송시열 선생의 학맥을 이은 서인으로서 벼슬보다는 학문연구를 통해 학식을 갖춘 학자이다. 외암 마을은 원래 평택 진씨의 집성촌이었다. 그러던 것이 외암 선생의 5대조인 이사종님이 진씨 문중의 딸과 결혼하여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그 이후 타성들이 하나, 둘씩 이 마을을 떠나면서 현재는 예안 이씨들만이 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들어가 보면 전시관이 나온다. 전시관이라고 해서 건물을 거창하게 지어놓은 것이 아니고 한옥으로 된 일반 집의 헛간이나 광에다 옛날에 사용하던 농기구나 생활용품, 즉 삼태기, 둥그미, 멍석, 무자위(높은 곳으로 물을 퍼 올리는 기구)등을 볼 수가 있다. 요새는 우리가 좀처럼 볼 수 없는 물건이어서 생소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불과 4-50년 전만 해도 농촌에서 농경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그곳에서 돌계단 몇 개를 밟고 올라서면 왼쪽으로 작은 야산이 보이는데 초입에 이간 선생의 유택이 있다.

 

 

 

 

 

 

 

 

굵은 참나무와 커다란 적송 몇 그루가 있는 산모퉁이를 돌아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더러는 빈집도 있지만, 다들 사람들이 사는 흔적이 보인다. 어느 집은 아주머니가 가을걷이를 하기도 하고, 또 다른 데서는 밭갈이를 하는 농부의 모습도 보였다. 골목길을 지나 긴 돌담길을 가다 보니 안채는 기와집이고 바깥채가 초가집인데 서너 사람이 지붕에 올라가 초가집의 영을 잇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60여 년 전 이맘때에 선친께서 직접 짚으로 영을 엮어서 초가지붕을 씌우던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돌아가신 지가 벌써 만 34년이나 되었는데도 어젯일 같고 아버지가 보고 싶다.

 

 

 

 

 

 

 

맑은 도랑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 동네 동편길을 따라 걷다 보면 괴물 같은 느티나무를 만나는데 수령이 무려 600년이나 된다고 하니 이 마을의 역사도 이 느티나무를 통하여 짐작할 수가 있다. 마을 입구까지 내려오면 올라갈 때 굵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있던 야산의 반대편인데 그네가 매어진 뒷산으로 올라가 직접 나무를 살펴보니 참나무는 상수리나무였다. 수령이 2-300년은 족히 되었고, 느티나무도 그 정도로 되어 보였다. 적송은 150년 안팎으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수종 3개 수종이 그 자리를 오래도록 지키면서 오가는 사람들의 마중과 배웅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애환을 같이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나이가 먹을수록 과거를 점점 더 먹고 산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이런 것이 다 사람 사는 모습인데 그동안 편안한 아파트 생활에 너무 젖어 원래 우리의 모습을 잊고 산 것은 아닌지 충남의 외암리 마을에 와 보고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