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처남 내외들과 베트남의 다낭을 가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19. 12. 19. 02:08



올해는 어떡하다 보니 처남내외들과 같이 놀러가는 행사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지난봄에 양평에서 출발하여 홍천으로 해서 소양강을 거쳐 남이섬까지 둘러보는 국내여행이었고, 12월 12일부터 5일 동안은 베트남의 다낭에 있는 명승지를 찾아보는 해외여행이었다. 다낭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 해외관광지로서 ‘일본상품불매’와 연관되어 가장 큰 수혜를 보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다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가 30대라고 하는데 한 비행기에 대략 200명 정도가 탄다고 해도 하루에 6천명이 들어오고 또 나간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한국인이 많이 찾는 베트남의 다낭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

 

베트남 여행은 8년 전인 2011년도에 저 북쪽의 하노이에 이어 다낭이 두 번째이다. 베트남의 전체인구는 2019년 현재 약 9,700만 명이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남쪽의 호치민시로서 1,300만 명이 살고 있다. 수도인 하노이에는 약 800만 명이 살고 있고 우리가 이번에 갔던 다낭에는 120만 명이 살고 있다. 다낭의 위치는 베트남의 남북길이가 약 1,650km인데 중간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비행기로 한국에서 갈 때는 4시간 반이 소요되고, 올 때는 다소 빨라 4시간 정도가 걸렸다. 시차는 우리보다 2시간이 더 늦다.


요즘 베트남은 우기(雨期)여서 거의 매일 같이 비가 오는데 우리가 가는 날도 비가 오더니 하루만 빼놓고는 오기 전날까지도 비가 내려서 운동화를 신은 위로 물이 스며들어와 양발이 젖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게 나을 때가 있다. 햇볕이 나면 한 낮으로 온도가 27-8℃까지 올라가 더운데다가 돌아다니려면 땀까지 흘려야 해서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비 말고는 조금씩 내리는 이슬비는 여행하는데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야간으로는 기온이 21-22℃로 떨어져 바람막이 옷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묵는 호텔 앞이 20km가 넘는 긴 해수욕장(미케비치)이어서 아침, 저녁으로 시간 될 때 산책하는데 더 없이 좋았다. 한국은 오전 7시가 넘어도 껌껌한데 다낭은 새벽 5시 반만 돼도 훤해서 이른 새벽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침은 호텔식이라 이것저것 많이 챙겨 먹었다. 6시 반부터 아침을 주기 때문에 밥시간은 넉넉하다. 아침을 먹고는 시내투어를 나갔다. 90% 이상이 불교신자여서 성당이나 교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1923년도 프랑스 식민통치시기에 건축했다는 다낭대성당을 들렀다. 안에는 입장이 안 되어 들여다 볼 수가 없어서 겉모습만 보고 온 것이 다소 아쉬웠지만, 거기까지 걸어가면서 초·중·고가 한 곳에 있는데 그 애들의 밝은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이 좋았고,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데 길게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주차해 놓은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토바이는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다. 성당에서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까오다이교 사원엘 들렀다. 까오다이교는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하는 기본 이념에 따라 불교, 기독교, 마호멧교, 공자 등 장점을 따서 교리를 만들었다. 들어가서 보면 천안이라는 한쪽 눈만 크게 그려놓은 것이 일반적인 종교하고 크게 차이가 있어 보인다.


다낭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오행산으로 이동했다. 산 전체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마불 마운틴이라고 불리며 베트남인의 민간 신앙인 물, 나무, 금, 땅, 불을 상징하는 5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어 오행산이라고 부른다. 우리 일행은 동굴로 들어가 동굴관광을 했다. 원래 일반적인 동굴에 들어가면 시원한 맛이 있는데 이 동굴은 땀이 흐를 정도로 덥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을 먹은 후 보다는 먹기 전에 전신 마사지를 받는 것이 좋다고 하여 우리는 다 같이 마사지 집으로 들어갔다. 5,6층 되어 보이는 건물 전체가 다 마사지실이다. 옷을 다 벗고 팬티도 거기서 주는 것으로 갈아입고 발을 씻는 것으로 시작하여 등 마사지까지 끝내려면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마사지 걸에 따라 강도나 테크닉이 차이가 난다. 이번에 베트남 가서 마사지를 모두 두 번을 받았는데 첫 번째는 대단히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정통 마사지로 유명한 태국이나 중국에서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아오는 날 받은 마사지는 같은 집에서 받았는데도 썩 시원하다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처럼 이렇게 실제로 체험해보지 않으면 별 차이점을 모르고 다들 그게 그거라고 편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야박하게 매니저가 들어와서 어떠냐고 물을 때 괜찮지 않다고 얘기할 사람이 몇 되겠는가.


아침식사를 빼놓고는 나머지는 거의 다 현지식으로 먹었다. 상추쌈은 한국에서보다 더 흔하게 나왔다. 쌀국수도 우리 입맛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음식으로 인해 고통 받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고등학교 친구들 내외와 같이 해외여행을 갔다가 한 친구가 음식이 맞지 않아 돌아오는 날까지 제대로 음식을 못 먹고 고생했던 모습을 봤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는데 기우였다.



점심 식사 후 호이안을 가기 전에 강 흙을 파 올려 도자기를 구워서 판매하는 곳을 들렀다. 100세 가까이 된 할머니가 원래 장인인데 지금은 며느리인지 딸인지 몰라도 중년의 여성에게 전수해주고 일은 하지 않았다. 중년 여성이 그릇을 빗고 그 여성의 딸이 발로 물레를 돌렸다. 각종 모양의 도기가 선반에 가득 진열되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간혹 새 주인을 만나 먼 길을 떠나는 도기도 눈에 띄었다. 도기 가게를 빠져나와 호이안으로 가기위해 강물에 정박한 배를 탔다. 강을 따라 20여 분 정도 가서 호이안에 도착했다. 호이안은 광남성의 남중국해 연안에 있는 인구 약 8만 명의 작은 도시이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1세기경에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가 여기 있었고,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베트남의 ‘바다의 실크로드’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국제무역 항구였다. 그 후 중국의 화교와 일본인에다가 인도인, 네델란드인 등 서구 상인까지 드나들며 마을을 형성하여 정착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서구적이면서도 동양적인 풍경이 자리 잡았다.





















호이안 구시가지 투어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이 몇 군데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내원교’인데 호이안에 정착한 일본 상인이 1953년 건설한 돌다리에 기둥을 세워 기와를 얹어 일본풍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에 다리 오른쪽에는 중국 상인들이 거주했고, 왼쪽에는 일본 상인들이 거주했는데 이들을 연결해주는 통로가 되었던 곳이어서 의미가 있다. 두 번째로 ‘광둥회관’인데 광둥출신의 상인들이 1885년에 건설했다고 하는데 건물의 각 부분을 중국에서 제작한 다음 호이안으로 옮겨와 완성시켰다고 한다. 패방에 기와지붕을 얹은 출입문은 붉은 색과 핑크색으로 도색하여 화려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풍흥의 집’이 있다. 풍흥의 집은 1780년에 중국 상인이 건설한 발코니를 갖춘 2층 목조가옥이다.80개의 목조기둥이 건물을 받치고 있고, 향과 향신료, 종이, 소금, 실크, 계피, 도자기 등을 판매했던 상점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개조한 인력거 모양의 씨클로를 타고 시내 여기저기를 투어하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기위해서 옵션이기는 해도 필요한 여행의 한 과정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옵션이 있었는데 투본강의 강물이 얕은 곳에 가서 ‘바구니배’를 타는 것이다. 바구니에 승객이 두 사람 타고 선장이 직접 노를 저어 강물을 따라 갔다 오는데 수백 척의 바구니배가 강물에 떠 있는 것도 보기가 좋고, 놀이꾼들이 우리나라의 가요를 불러 흥을 돋궈주기도 해서 재미가 있었다. 그 속에서 한참을 같이 어울리다가 돌아올 때는 석양이 하늘과 강물에 같이 물들어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호이안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야경투어에 나섰다. 세상에 있는 것은 다 여기에 모아 놓은 듯 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틈사이로 빠져 다니면서 상품구경을 하다가 그래도 이곳에 왔다간 흔적을 남겨야 되지 않겠나 싶어서 15,000원 짜리 혁띠를 하나 사갖고 나와서 호이안 야시장구경을 마쳤다.


어제 고단했던지 씻자마자 잠에 떨어졌다. 아침에 철썩거리는 파도소리가 너무도 커서 그 소리에 잠을 깼다. 한국은 바람이 불어야 파도가 높아지면서 소리가 요란한데 다낭의 바닷가는 바람 한 점 없는데도 파도도 높고 소리도 요란하다. 자력의 힘이 한국보다 더 세져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해변과 다른 현상을 여기에서 보고 있다.











다낭에서 거의 2시간 반을 달려서 세계 10대 비경인 하이반 고개를 넘어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카이딘 왕릉과 응우엔 왕조의 왕궁이 있는 후에로 이동했다. 왕릉이라고 해야 왕조의 역사가 길지 않고 짧다보니 콘크리트 건물로 호화스럽게 꾸며 놓은 것이 전부다. 카이딘 황제는 용우엔 왕조의 후기인 1916년에서 1925년까지 통치하였고, 이 능은 192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31년에 완공된 서구식 건물이다. 중국식을 본뜬 여타 왕릉과는 확연히 구분되는데 프랑스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유럽식의 건축양식이 처음으로 가미된 것이어서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황제의 유골은 동상 아래 지하 18m의 깊이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왕궁으로 가기위해서는 전동차를 나눠 타고 이동해야 했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1807년에 건립한 3층 규모의 건물에 16m 높이의 국기봉에 금성홍기(베트남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왜 이렇게 높게 세워 놓았느냐면 왕궁 어디에서든 국기를 다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왕궁으로 들어가려면 해저드 위로 나있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왕궁은 용우엔 왕조가 1802년부터 1945년까지 13명의 왕이 거주하던 곳인데 1803년에 설계하여 1832년에 왕궁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 최초로 보장의 유럽양식을 표방해 만들어진 성채의 길이가 2.5km이고 높이가 6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채 안에도 각 50m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사각형의 부지에 왕궁이 자리 잡고 있으며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서 건설됐다고 한다. 베트남 최초로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후에에서 이것 말고도 티엔무 사원을 관람했는데 1602년 건립한 7층 석탑이 유명하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버스를 타고 약 3시간 가까이 달려서 바나산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 입구에서 케이블카 타는 데까지는 한참을 걸었다. 후에에서는 가끔 빗방울이 떨어지던 것이 우리가 케이블카를 탈 때쯤에는 산에 나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운무가 잔뜩 끼어 바나산의 좋은 구경거리를 보지 못하도록 막아 버렸다. 기네스북에 올라가 있는 베트남에서의 가장 긴 케이블카인데 타는 시간이 20분 남짓 되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좀 더 올라가면 유럽식 테마파크가 있고, 1919년 프랑스 식민 정부에서 해발 1,400m에 건설한 힐 스테이션이 나온다. 손바닥을 펴 다리 기둥을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손, 귀가 달린 조각상을 조우한다. 좀 더 올라가 썬 월드광장 가운데로는 크리스마스 상징물과 산타클로스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운무에 비까지 내려 날씨가 썰렁하기 때문에 방한 옷을 하나 챙겨온 것을 꺼내 입어야 했다. 동화나라에서 볼 수 있는 바나산 정상에 와서 야간투어를 마치고 80가지 메뉴를 맛 볼 수 있다는 테마파크뷔페 식당으로 들어가니 밥 먹는 사람은 크게 많지 않은데 5인조 밴드가 신나게 ‘징글벨’노래를 불러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띠우고 있다. 더구나 식사를 하면서 마시라고 1인당 맥주 1천㏄를 공짜로 주니 상당히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음식 값에 포함이 다 되었다고 해도 놀러온 기분을 한껏 올리는데 충분했다.

 



식당에서 나오니 비가 더 많이 내렸다. 운동화가 젖어들었다. 바나산국립공원에서 1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달려서 다낭시내의 한강으로 들어왔다.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시내 밤 구경을 하면서 가다가 배가 멈추는가 싶더니 저 앞 건물에서 ‘불쇼’를 했다. 커다란 불기둥이 3-4m 쫙 나왔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여기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이벤트라고 한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을 맞았다. 오늘은 다낭에서의 마지막 아침이라 아침시간이 상당히 여유가 있어 호텔 앞길을 건너가 세계6대 해수욕장 중의 하나라는 미케비치 백사장을 따라 천천히 한참을 걸어보았다. 언덕 밑으로 우리나라의 나팔꽃 모양의 분홍 꽃들이 환하게 아침인사를 한다. 내 나이가 칠십이 다 되었는데 여길 또 언제 오겠는가 싶어 보고 또 보며 미케비치를 걸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링엄사(靈應寺)에 들렀다. 링엄사는 손트라해변의 끝자락인 산중턱에 있는데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절이다. 2003년도에 지어진 절이라 역사는 깊지 않으나 많은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비밀의 사원이라고 해서 다낭에서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대웅전 앞 18나한상은 2m가 넘는 대리석을 깎아 만들었고, 다낭시내를 내려다보는 68m의 미륵보살은 다낭의 모든 중생을 굽어 살펴주는 듯 인자한 모습이다. 남의 나라 종교를 갖고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으나 한국의 불교사찰하고 비교했을 때 너무 외관에만 신경 쓴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낭의 인구가 120만 명이라고 했는데 원래 다낭을 설계하면서 기본 인프라구축을 인구 약 50만 명에 맞추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두 배가 넘게 사람들이 사니까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가 다낭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는 날도 다낭의 신도시 전체가 아침 7시에 전기가 나가서 저녁 7시가 되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마사지를 받을 때도 불편했고, 점심 식사할 때는 덜했지만 저녁식사 때는 랜턴을 켜놓고 껌껌한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특이한 것은 전기 사정이 이렇게 안 좋은데도 베트남에는 수력이나 원자력이 하나도 없고 오직 화력발전으로 충당한다고 하니 이참에 우리가 원자력발전소를 수출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싶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차밍쇼’를 보러 갔다. 음악과 춤이 있고 묘기가 있는 다채로운 공연이었다. 묘기 말고는 음악과 춤은 단체로 한 몸이 되어 촘촘히 움직이어야 하는데 단 한 건의 실수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공연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갈채를 보냈다. 베트남에 와서 좋은 공연을 보고 가서 정말로 잘 했다는 생각이 들고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으로 본다.


이번 베트남 여행은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왔는데 의외로 많은 수확을 거두웠다고 생각한다. 우선 참석한 큰처남 내외를 비롯해 둘째, 셋째 처남내외 및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한 막내처남은 다소 아쉬웠지만 그런데도 혼자 참석하여 여행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주신 막내처남 댁과 우리내외 등 9명이 아무 탈 없이 즐겁게 여행을 마쳤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고, 또 하나는 여기서 우리가 보았던 베트남에 대한 선입견이 여지없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서 보니 일단 사람들이 밝고, 젊고, 생동감이 있어서 다가오는 미래가 밝을 것으로 예측할 수가 있고, 마지막으로는 짧은 시간이기는 하나 그들의 과거 및 현재의 삶과 문화를 가까이서 살펴봤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우리와 거리상으로 가까운 이웃은 아니지만 가까운데도 허구한 날 해코지만 하려는 그런 나라에 비하면 베트남은 심성이 착한 민족인데다 여유가 있는 민족이어서 우리가 그런 점은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비록 얼마 안 되었지만 베트남 다낭에 가서 구경 잘 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와서 고마운 여행이 되었다. 며칠 동안 박식한 역사지식과 유창한 언어실력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안내를 해주신 박병규 가이드 선생께 감사했다는 말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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