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역사기행」연천에 경순왕릉을 가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19. 9. 20. 19:50




초가을 날씨치고는 너무도 좋다. 바람이 선들선들 부는 것도 그렇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기온도 적당하여 나들이하는데 조금도 흠잡을 데 없는 좋은 날씨다.


이 여행은 원래 27일 역사기행모임에서 회원들과 같이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날은 시간이 안 되어 평소에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이렇게 갑자기 집을 나서서 연천시티투어를 하게 되었다. 연천시티투어는 여러 코스가 있지만, 우리는 5호선 공덕역 3번 출구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하는 코스여서 바쁜 아침시간인데도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이 코스는 연천의 25사단 상승전망대에 가서 제1땅굴과 북한과 마주하는 철책선을 보고, 신라 56대 마지막 왕인 경순 왕릉에 들렀다가 1930년대에 인구 6만 명이 살았다는 고랑포구 기념관을 둘러본 후 고구려의 남방3대 성중의 하나인 호로고루 성까지 탐사를 하고 귀경하는 코스이다. 왕복교통비는 15,000원이고 점심은 각자 별도로 지불하면 된다.


마포를 출발한 관광버스는 고양에 가서 관광객 몇 명을 더 태우고 자유로를 거쳐 상승전망대를 갔는데 두 시간이 채 안 걸리고 1시간 40분 정도 걸린듯하다. 시내를 벗어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벼가 익어 누렇게 변한 황금들판을 볼 때는 마음 넉넉함이 들다가도 지난 ‘링링’태풍으로 군데군데 쓰러져 있는 벼들을 볼 때는 가슴이 많이 아팠다. 그런데다가 타고 가는 버스 TV뉴스에서 파주에 이어 ‘돼지열사병’이 연천까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큰 재앙이 지금 우리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어서 더는 확산되지 말고 여기서 진정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부대 안쪽으로 들어와 상승전망대로 나가기 전에 부대 정훈장교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듣고 유관으로 볼 수 있는 전망대를 나가니 내려다보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실제로 제1땅굴이 보이고, 남·북방한계선에 설치한 철조망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북한이 서로 대치하면서 대남·북 방송을 하던 시절 같으면 상당히 긴장했을 텐데 문 대통령 들어서 북한과의 사이가 많이 좋아져 편안하게 우리나라 최전방의 철책선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상승전망대에서 내려와 PX에 잠시 들렀는데 연천의 특산물인 율무로 만든 막걸리가 유명하다고 하여 혹시 있으면 두어 병 사갖고 갈까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아 병사한테 물어보니 최전방 초소라서 술은 아예 팔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군대생활 할 때만 해도 PX에 가서 막걸리를 사와 회식을 했던 기억이 있어 당연히 있을 것으로 봤다. 대신에 과자종류는 상당히 많은 편이어서 입맛에 맞는 것(산도)을 골라 하나 들고 나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던 마누라는 이것저것 묵직하게 사들고 나왔다.




부대를 빠져나와 점심을 먹으러 가는 도로 옆으로 ‘돼지열사병’을 취재하러온 각종 언론매체 취재차량으로 막히더니 식당에도 취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간신히 저 구석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다가 식당에는 이곳의 특산물인 율무로 만든 막걸리가 당연히 있을 것 같아 막걸리 한 병 달라고 했더니 율무막걸리는 없고 시중에서 흔하게 마시는 일반 막걸리 한 병을 가져왔다. 아니 연천군에서 나오는 특산물로 빚은 술이라고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쉽게 구입해서 마실 수 있게 해야지 꼭꼭 숨겨놓은 보물처럼 찾을 수 없다면 있어도 없는 것만 못하지 않겠는가. 가이드 선생이 연천에서 나오는 율무생산량이 우리나라 전체물량의 6-70%를 차지한다며 연천에는 ‘율무막걸리’가 명물이라고 자랑만 하지 않았어도 여기저기 가서 ‘율무막걸리’를 찾지 않았을 텐데 밥을 먹고 돌아오는 내내 아쉬움이 남았다.







이제는 경순왕 능으로 가보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성이 김(金)씨이고 이름은 부(傅)이다. 경애왕이 후백제의 침공을 받아 견훤에게 시달림을 받다가 온갖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여 그 후임으로 왕위에 올라 서기 927년-935년까지 약 9년 간 신라의 왕으로 있었으나 백성들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 지고 나라를 재건할 여력이 소진되었다고 판단하여 왕족과 관리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기 935년에 왕건을 찾아가 스스로 992년의 신라의 사직을 내려놓았다. 경순왕은 경주에서 죽방부인 박 씨와의 사이에 4남매를 두었고, 왕건의 큰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7남매를 두었는데 공주가 금강산 돈도암으로 출가하자 다시 순흥 안씨를 왕비로 맞아 9남을 두었다. 비운의 경순왕은 신라의 경주에 1만호를 식읍으로 받고, 딸이 고려 5대왕인 경종의 제1비인 현숙왕후의 아비요, 경종의 장인으로 살았다. 말년을 경주가 아닌 개성에서 살다가 서기 978년 4월 4일에 8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하는데 출생일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정설이다. 구 신라 관리들이나 백성들은 경주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루기를 원했으나 고려 조정에서 왕릉은 개경에서 100리(40km)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내세워 지금의 연천에다 장례를 모시게 했는데 경주로 못 가게 한 이유는 장례를 구실삼아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소요나 민란을 걱정하여 경주로 가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이렇게 경애왕에 이어 신라의 56대 왕위에 올랐으나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서 죽어서도 고국이고 고향인 경주를 가지 못하고 연천에 묻혀 있다. 주차장에서 포장된 언덕배기를 얼마 올라 가지 않아 경순왕 능이 나왔다. 경주에 가면 왕릉들이 모두 산처럼 큰데 그에 비하면 경순왕 능은 아주 초라한 편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부마이며, 고려 5대왕인 경종의 장인으로 130여 성씨의 시조인 경순왕이 정수원이라는 작은 절에 관청 노비가 부역한 재물로 제사를 모셨다는 것을 보니 호구를 면한 나그네 눈에도 비참할 지경으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후 임진란 때 도굴되어 완전히 소실되었던 것을 1747년 5월 25일 후손이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능호를 서능이라고 재가를 받아 비석도 세우고 봉분도 복원하였지만 6·25 전쟁을 겪으면서 휴전선과 불과 200m 거리에 있으면서 격렬한 전투로 비석에 총탄흔적이 그대로 남아있고, 오랜 기간 전쟁 통에 잡목과 잡풀로 뒤덮여 있는 경순왕의 비석을 어느 병사가 발견하고 상관에 보고하여 나라에서 경순왕의 능이라는 것을 확인하여 재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돌아가신지 1041년이 흘러간 2019년 9월 18일 연천에 와서 경순왕의 능 앞에서 머리 숙여 예를 갖췄다.







경순왕 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랑포구 역사공원으로 이동했다.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임진강을 이용해 물자교류 중심역할을 하던 나루터였다. 1930년대 만해도 개성의 배후도시로 고랑포구에 6만 명이라는 주민들과 상인들이 살고 있어 서해안과 서울에서 많은 배들이 들어와 교역을 했으며 서울의 화신백화점 분점이 생길 정도로 생활수준도 꽤 높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던 고랑포구가 6·25전쟁과 남북분단으로 쇠락의 길로 빠져들어 지금은 터만 남겨놓고 그 자리를 역사공원이 대신하고 있다.


호루고루성을 가기 위해 우리는 임진강변으로 갔다. 성 가기 전 양길가로는 온통 해바라기꽃으로 가득찬 꽃밭이었는데 지난 ‘링링’태풍이 지나가면서 변변한 해바라기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 쓸고 지나가서 모두 누워있는걸 보니 마음도 아프고 아쉬움이 크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지나가는 내내 우리를 보고 어서 오라고 환영인사를 해줄 해바라기꽃이 아니던가. 








임진강 유역은 기원후 4세기까지는 원래 백제땅이었다. 임진강 서북쪽은 한나라 낙랑군과 접경지역이었고, 동북쪽으로는 말갈족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요충지였다. 그러던 것이 4세기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으로 백제의 도성이 함락되고, 아신왕이 항복함으로써 임진강 일대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계속하여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여세를 몰아 아산만에서 영일만까지 이르는 영토를 확장하여 우리나라 역사 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군주가 되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늘 정세변화에 따라 적과의 동침도 하다가도 틈이 벌어져 전쟁도 하게 되는 것이 다반사여서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고구려 남쪽 국경을 침략하여 한강 아차산 방어벽이 무너지고 임진강까지 후퇴해야 했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고구려의 진지들이 남쪽으로는 신라의 진지를 구축하여 120여년 동안 고구려가 서기 668년 나당연합군에 망할 때까지 긴장감을 이어갔다. 나당연합군에 고구려가 멸망하고도 당나라군이 한편이었던 신라군을 내쫓기 위해서 전쟁을 할 때 호루고루에서 있던 고구려 패잔병들이 신라를 도와 당나라군과 싸웠다는 기록도 있다. 호루라는 말은 병모가지처럼 넓은 것이 좁아지는 것을 말하는데 임진강에서도 넓은 강물이 좁아져 말을 타고 강물을 건너갈 수 있는 지역을 호루지역이라고 하여 상당히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호로고루성은 당포성, 은대리성과 함께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의 대지위에 조성된 독특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임진강이 국경하천역할을 했던 삼국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귀중한 문화유적이다.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연천여행을 떠나 천여 년 전에 앞서 가신 경순왕릉이 왜 연천에 와 있게 된 연유도 알게 되었고, 호루고루성이 있는 임진강이 삼국시대 때 고구려, 신라, 백제의 각축장이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8-90년 전에 임진강포구에 인구 6만 명이 살던 큰 도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도 고랑포구 말고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 아닐까 싶다. 특히 상승전망대에 가서는 높게 설치된 철책선을 보고 분단조국의 아픔을 실제로 느끼기도 했다.


우리를 위해서 장시간 안내와 해설을 해주신 최병수 선생께 고맙다는 인사말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