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2월의 역사기행을 용산의 전쟁기념관으로 가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19. 2. 28. 14:29




이번의 역사기행은 상당히 의미 있고 특별한 역사기행이었다. 여느 때처럼 고궁이라든가 아니면 고찰, 왕릉이 아니고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싸움은 계속 있어 왔다. 오래전부터 씨족, 부족 간의 싸움으로 세력과 몸집을 키워가는 통합의 과정을 거쳐 국가가 형성되어 국가 간의 싸움을 전쟁이라고 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고대부터 6.25사변까지 전쟁의 역사를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는 서울에 용산의 전쟁기념관으로 왔다.


전쟁기념관은 지인의 결혼식이 있어 몇 번 갔었기는 해도 그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없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1989년 육군본부가 대전으로 이전한 후 새로이 건물을 지어 1층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선사시대부터 조선중기, 또 조선후기부터 일제기간동안의 전쟁 역사관으로 그리고 2층은 전체를 6.25전쟁과 관련된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3층은 해외파병과 국군의 발전상을 볼 수 있는 역사관으로 구분하여 놓았다.


전쟁기념관을 밖에서 계단을 따라 들어가 보면 1층 같은 2층이 나온다. 여기가 6.25전쟁기념관이다. 전시관 입구의 벽에는 6.25 때 전사한 국군과 UN군 용사의 이름이 동판에 빽빽이 새겨져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한다. 막내 외삼촌이 6.25전쟁 때 전사하여 혹시나 해서 눈여겨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기념관 안에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할 때까지 여러 섹타로 구분하여 별도의 코너를 만들어 관람자의 시각적인 이해도를 높였다.


그러면 6.25전쟁을 약사(略史)로 언급해 본다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남한을 기습 공격해 오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있던 우리 국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전쟁이 발발한 후 불과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두 달이 안 되어 부산이 코앞인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다. 1950년 7월에 유엔군이 참전을 했고, 탱크를 앞세워 승승장구하던 북한군은 공군력이 약하다 보니 유엔군의 강력하고 우월한 제공권으로 기세가 꺾일 때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북한의 보급로 차단에 성공하여 유리한 전쟁으로 전장이 바뀌게 되었다. 1950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밀어 붙였는데 그해 11월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강추위에 전투경험이 풍부한 중공군에 비해 국군과 유엔군은 영하 3-40℃를 오르내리는 추위와 싸워야 했고, 또 적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를 겪다가 전투력이 약화되어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빼앗겨야 했다. 그 후로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력을 재정비하여 1951년 3월 16일 수도 서울을 재 수복함으로써 정치 심리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지만 3년 넘게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던 전투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6.25전쟁은 한반도를 참혹하고 피폐하게 만들었다. 1500년 이후에 있었던 세계전사(戰史) 중에 6.25전쟁에서 군인 전사자가 7번째로 많았다. 자료마다 수치가 다르기는 해도 이 전쟁으로 약 140여만 명(국군:14만, 경찰:3만, 남한민간인:24.5만, UN군:4만, 북한군인:52만, 북한민간인:28.2만, 중공군:15만)이 죽었으며 다치거나 실종자도 300만 명이 넘고, 이산가족도 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뿐이겠는가. 한국의 산업시설은 43%가 파괴 되었고, 주택은 33%가 손괴 되어서 경제적 손실이 230억불이라고 하는데 그 보다 훨씬 더 클 것으로 본다.


2층 6.25기념관을 둘러본 후 1층으로 내려가면 중앙에 큼직한 거북선모형이 자리 잡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아주 오래전 구석기시대인 BC 일만 년 전부터 사용하던 무기는 있었으나 본격적인 전쟁은 3국 시대에 들어와 안으로는 고구려‧신라‧백제 등이고, 외부와는 수‧당‧요 등과의 싸움이 자주 있었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주로 전쟁을 중국(명‧금)과 일본 등과 많이 하고, 무기도 조선 중‧후기에 조총이 만들어져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층 전시관에서의 눈여겨봐야 할 것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한 ‘살수대첩’과 고려 때 강감찬 장군이 거란과의 전투에서 10만 대군 중 불과 수천 명만 살아간 ‘귀주대첩’, 그리고 조선 때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대승을 거둔 ‘한산대첩’이 한국전사에 빛나는 3대 대첩인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3층에서는 우리나라의 국력이 많이 커졌다는 자부감이 들었다. 6.25 전쟁 때 유엔으로부터 21개국이 지원을 받았는데 이제는 우리나라 국군이 분쟁이 있는 국가에 우리의 국군을 파병하여 도와주고 있으니 자부심이 들고 자랑스러웠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베트남전, 걸프전, 쿠웨이트,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파병된 사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상 무기가 옛날에는 돌, 동물 뼈, 나무 등으로 창이나 칼을 만들었던 것이 지금은 수백, 수천 KM를 날아가서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미사일로 발전하였다. 게다가 더 무서운 핵무기까지 개발하여 수천 년 이어온 우리 인류의 역사에 상당한 위협을 주고 있다. 전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거나 다쳐서 사람들을 많이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에 끝나지 않고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으며 설사 살아남는다고 해도 대대손손 후유증으로 고통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전쟁무기가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전쟁기념관! 이 말은 전쟁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기자는 뜻인데 한편으로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뜻 깊은 일이나 특별한 날을 골라서 얘기할 때 ‘결혼기념일, 생일기념일’ 등 축하와 관련된 말뜻이 떠올라 어색하기도 하여 ‘전쟁역사관’으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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