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5월의 역사기행을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가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19. 6. 6. 16:08




이번 역사기행은 인천의 ‘한국 속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리어지는 차이나거리로 갔다. 인천역을 빠져나가면 역 광장 앞에 그리 크지 않은 석조형의 기차모형이 있고, ‘한국철도 탄생역’이라는 글씨가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준다. 눈길을 길 건너로 돌려보면 붉은 색깔의 거리출입문이 차이나 거리라는 것을 멀리서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단한 영화를 누렸던 ‘올림포스호텔’이 수명을 다한 고목처럼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월미도를 갈 때 오며가며 겉모습만 몇 번을 봤지 실제로 직접 들어가 보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동아쏘시오그룹 임원출신 모임인 ‘우성회’ 소분과 분회의 역사기행팀에서 여기를 간다고 하길래 따라와 역사해설가를 대동하고 ‘차이나거리’를 둘러본 얘기를 해볼까한다.


인천은 19세기 초·중반만 해도 평범한 어촌이었다. 그런데 인천은 19세기 중·후반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뿐만 아니고 멀리 떨어진 미국, 프랑스까지도 넘보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조선의 정정(政情)이 불안한데다가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을 겪으며 종전에 일본 쪽으로 기울었던 조선외교가 청(중국)나라로 급격하게 바뀌게 되었다. 1884년 인천 제물포지역이 청나라 조계지(치외법권)가 설정되고,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가 생기면서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가 ‘한국 속의 작은 중국’ 으로 불릴 만큼 차이나타운이 조성되어서 중국의 음식뿐만 아니라 생활문화가 이곳에서 꽃피게 되었다.


지금의 차이나타운이 있기까지는 좋은 것만 있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5월 하순 중국 장춘근교 만보산에서 한·중 농민들이 수로 개설문제로 다투다가 충돌이 일어나 중·일 경찰이 출동해 총격전까지 벌어졌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는데도 국내에 잘못 알려져(당시 조선일보 한국인 200여명 사망) 한국인들의 애꿎은 화교습격사건이 일어났다. 그해 7월 2일 저녁 8시 학생으로 보이는 수십 명이 외리 일대에서 중국식당에서 음식을 먹은 후 돈을 내지 않아 싸움이 벌어졌고 3일 새벽 2시에 화교들이 하는 이발소, 요리점 등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질렀다. 경찰이 화교보호에 미온적이자 위협을 느낀 화교들은 청관 안으로 피했다. 성난 군중들은 경찰 저지망을 뚫고 4일 새벽 3시 살인사건으로 번져 화교 2명이 사망하고 상점이 약탈당했으며 청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화교 만 명이 이통환(利通丸)편으로 귀국하기도 했다. 화교공격은 전국으로 번졌고, 일본이 고의로 꾸민 은밀한 작전이어서 일본경찰은 이를 방조하거나 부추겼으며 나중에는 청나라를 침략하는데 구실로 삼았다. 아픈 역사를 한 가지 더 얘기한다면 6·25전쟁 때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이곳에 집중포격을 퍼부어 차이나타운이 초토화되었는데도 이렇게 끈질기게 버텨서 지금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대견스럽다고 어찌 얘기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이렇게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같이 전한다.


이제 차이나타운의 얘기를 해보자. 차이나타운은 자유공원 올라가는 경사로에 있다. 오르막 길 좌우로 식당과 상점들이 즐비하다. 좀 올라가다 보면 공화춘(共和春)이라는 건물이 나오는데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짜장면을 처음 만들어 최초로 공급했다는 집이다. 지금은 식당은 하지 않고 짜장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짜장면의 역사는 1890년대로 올라간다. 부두의 하역인부들이 손쉽게 허기를 달래고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국수에 춘장과 채소를 섞어준 것에 기인한다고 한다. 천천히 다녀보면 먹는 식당뿐만 아니라 초한지 벽화거리와 삼국지 벽화거리도 나와 볼거리도 다양하게 제공한다. 다니다가 시장하면 식당에 들어가 중국음식을 먹으면 되고, 크게 배고프지 않을 때는 길가에서 전병이나 호떡을 사서 입맛을 다시는 재미도 솔솔 하다.


벽화거리를 좌측에 두고 산쪽으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자유공원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나무그늘 길을 걷다가 우측으로 갔더니 ‘석정루’라는 정자가 나오는데 2층으로 높게 지어 놓아서 올라가 보니 인천해안가가 훤하게 다 내려다보이는데 제물포 지역은 상당히 복잡해 보였지만, 월미도 해안 쪽은 다소 여유롭게 보였다. 다시 되돌아 나와 공원 쪽으로 나있는 숲속 길을 오래 걷지 않아 야외음악당 광장이 나오고 광장 끝 쪽으로 맥아더 장군 동상이 보였다. 동상 입구 양길가로 장미가 활짝 피어 진한 장미꽃 향기가 장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했다. 맥아더 장군은 6·25전쟁에 미국 군인으로 참전하여 우리나라가 북한에게 부산만 남겨놓고 모두 빼앗겼을 때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아주 불리한 전장을 유리하게 이끌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렇게 있게 한 고마운 분으로 한국 사람들에게는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될 것이다.


자유공원을 보고 언덕 밑으로 조금 내려오면 한옥으로 지은 인천시장공관이 나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공관으로 쓰다가 이제는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인천의 발전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시장 구관사에서 내려오다 보면 지금의 중구청사가 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내려오면 옛날에 은행들이 있었던 금융거리가 있다. 건물에는 ‘조선은행’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건물이 제일은행 건물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전람실로 이용하고 있다. 이 전람실을 돌아본 후 마음에 남는 것은 지하에 숨겨진 지하실이 있었다는 것이고, 옛날의 금융거리를 모형화하여 탁본으로 재현한 것이 특별해 보였다.


얼추 평지를 내려오면 일제시대 때 우리의 쌀과 소금을 수탈하여 일본으로 가져가기 전에 보관하던 붉은 창고가 몇 개가 있다. 그곳을 둘러보고 한중문화원 방향으로 가는 중간에 왕의지(王義之) 석상을 큼직하게 만들어서 세워놓았다. 한중문화원 안에는 도자기, 공예품, 탈, 서예품 등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중문화원을 끝으로 보고 나와 도로를 따라 5분 남짓 걸었는가 싶은데 차이나타운 거리가 나왔다. 빙 둘러서 다시 처음 올라갔던 데로 나온 것이다. 늦은 점심식사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에는 한가한 모습이다. 미리 예약을 해놓았는데도 나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다들 시장하지는 않았는지 보채는 사람 없이 차분하게 앉아서 배갈 한 잔씩 나누다 보니 본 요리가 들어왔다. 배갈 서너 잔을 마셨더니 속이 후끈 달아올랐다. 오래 전에 북경을 가서 매 식사 때마다 밥상 위에 배갈 술병이 있어 배갈을 한 잔씩 하던 생각이 나서 북경에 온 기분을 인천에 차이나타운에서 느껴본다.


이렇게 인천에 차이나타운에 오면 둘러볼 곳이 많은데도 사람들이 몰라서 대체로 차이나타운에서만 왔다갔다하다가 밥 먹고 그냥 가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되어 몇 군데 둘러본 얘기를 해봤다.


“이번 역사기행도 김 회장님 덕분에 몰랐던 것도 잘 알게 되었고, 여기저기 잘 보고, 맛있는 식사도 잘 하고.... 감사합니다.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