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청산도를 가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19. 8. 9. 01:25




여행은 어떤 목적으로 떠나든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다가 남도(南島)의 빼어난 경관을 눈으로 보는 것 말고도 지역에 따라 맛집에 가서 이런저런 음식을 먹는 즐거움도 여행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부분이기도 하다. 전에는 관광버스를 타고 가끔씩 여행을 했었는데 근래에 하지 않다가 2년 전에 경남 남해 쪽으로 여행을 해보니까 볼거리도 많고 먹을거리도 다양해서 아주 즐겁게 여행을 마쳤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 작년에는 휴가 때 백두산을 가느라고 가지 못했던 버스투어를 올 여름에 다시 시작하여 청산도를 가기위해 집을 나섰다.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남동쪽으로 약 20km에 있는 섬으로서 면적은 약 33㎢이고 인구는 2016년 기준으로 2,182명이 살고 있다. 완도 항에서 배로 약 50분 정도가 걸린다. 청산도는 임진왜란 이후 주민들이 입도(入島)하였다고 하며 1896년에 완도군 청산면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지명은 물도 푸르고 산도 푸르다하여 청산도로 불리어졌고,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선산(仙山) 또는 선원(仙源)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다.




1993년에 임권택 감독이 제작한 ‘서편제’영화가 이곳에서 촬영했는데 아직도 여기저기 촬영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언덕배기에 올라서면 판소리 음악이 돌담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바다 쪽으로 내려다보면 육지 끝과 바다 초입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착각에 빠진다. 눈을 돌려 섬 안 쪽으로 내려다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붉고 푸른 지붕을 가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평화롭게 보인다. 봄에는 노란 유채꽃이 장관을 이룬다고 하는데 지금은 키가 작은 코스모스꽃이 간혹 눈에 띌 정도로 피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청산도는 육지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경남의 남해에 비해 개발이 덜 되고 때 묻지 않아 보였다. 섬인데도 논농사를 많이 짓고 있고, 더러는 밭농사도 짓고 있었다. 주민들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산 저위로 바위가 보이는 것이 ‘범바위’라고 하는데 차로 10여분 정도 타고 올라가서 5분 정도 걸어 산 정상으로 올라가야 ‘큰 범바위’와 ‘작은 범바위’를 만날 수가 있다. 한낮의 기온이 35~6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여서 조금만 걸어도 등줄기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날씨가 좋은 날은 범바위에서 바다 쪽을 내려다보면 바다 저 멀리로 제주도가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해무로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휴게소에 들러서 팥빙수를 먹기도 하고 또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잠시 더위를 식혔다.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10여분 넘게 달려서 섬 한가운데로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 버스가 멈춰 차에서 내렸다. 내리니 바로 청산도 명품마을이라고 큰 돌에다 글씨를 써서 ‘상서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 그 뒤로 골목길을 따라 걸어보니 집집마다 모두 담을 쌓아 놓았는데 하나같이 다 돌담이었다. 그것도 울퉁불퉁하게 쌓은 것이 아니라 아주 질서정연하게 차곡차곡 정성들여 쌓은 것이어서 그냥 슬쩍 보고 지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주도의 돌담이 나지막하게 듬성듬성 쌓은 돌담이라면 청산도의 돌담은 반듯반듯하게 각을 맞춘 돌담이라고 보면 된다. 참, 독특한 돌담마을의 모습을 청산도에 와서 보고 간다. 

 

다시 차에 올라 10분 넘게 달려서 온 곳이 진산리 ‘해 뜨는 마을’이었다. 여기는 청산도에서 동쪽으로 보였다. 작은 항구 같은데 배는 보이지 않고 몽돌로 된 해변에 맑은 바닷물이 철썩거린다. 다들 손을 씻고 발을 담가서 더위를 쫓고 있지만 원체 더위가 극성을 부리니 물속에 있을 때 잠시 시원하다가도 신발을 신고 돌아서면 이내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이마에 땀방울이 금방 맺힌다. 뭐니 뭐니 해도 에어콘이 있는 버스 안이 가장 시원하지 않나 싶다.


앞에서 잠시 얘기를 했지만, 청산도는 인위적으로 개발을 하지 않아서 되도록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도록 노력한 듯 보였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제주의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 또는 조금 이름이 있다는 길을 걸어보면 안내판뿐만 아니라 도보길 자체를 보기 좋고 걷기 좋게 데크를 깔아서 잘 단장해 놓았다. 여기 청산도에도 슬로(slow)길이 제 1코스부터 11코스까지 총길이가 42km 길이가 되는데 다 걸으려면 꼬박 3일을 걸어야 될 것으로 본다. 이렇게 청산도에 있는 슬로길은 유별나고 특별하게 만들어 놓지 않아서 실제로 걷는 길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 슬로(SLOW)길이 뭔지,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원래 슬로우 시티(slow city)라는 말은 1999년 10월 이태리 그레베 인 키안티 작은 마을에서 식생활 개선운동에서 시작하여 느리게 살기(slow movement:여유 있는 삶)를 실천하는 마을을 가꾸자는 걸로 변천했다. 천천히 먹고, 천천히 움직여 여유롭게 사는 마을을 만들어 보자는 본래의 취지를 받아들여 청산도의 푸른 바다와 산, 구들장 논, 돌담길 등 상징성을 살리고 천혜의 자연환경에서 한숨 돌리며 쉬엄쉬엄 같이 살자는 슬로우 운동이 시작되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 주고 일터에 가던 기존에 다니던 길을 그에 걸맞게 조금 더 보완하여 슬로우 길을 만들어 2011년 국제슬로시티연맹이 청산도 슬로길을 세계 슬로길 1호로 공식 인증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모쪼록 청산도의 슬로우길이 세계가 인정하는 1호답게 명품길로서 손색이 없도록 국민들뿐만 아니라 지자체 또는 국가에서도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태풍이 온다하여 여행일정을 바꿔서 청산도를 일찍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저녁때가 다 되어 석양이 아름답게 하늘과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 태풍이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는지 바람도 세차게 불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청산도에서 흘린 땀을 한 시간 가까이 배를 타고 완도로 나오면서 다 식혔다. 완도에 도착하니 벌써 어둠이 깔리고 전깃불이 들어와서 도회지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저녁식사는 완도의 특산물인 전복요리에다 꽃게, 생선구이, 나물 등 다양한 반찬이 밥상을 꽉 채웠다. 이처럼 푸짐한 밥상을 2년 전에 남해 가서 받아보고 또 다시 받아본다. 그 때는 달달한 유자술로 반주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대중과 애환을 같이한 소주로 건배하며 완도에 온 기분을 돋웠다.


저녁식사를 맛있게 들고 바깥으로 나와서 마누라와 함께 해안로를 따라 숙소까지 걸었다. 완도도 섬인데 어떻게 보면 육지의 남쪽 끝이라 생각되기도 하는 데까지 와서 좋은 밤을 마누라와 같이 보내고 있다. 다들 노래방이다 호프집이다 2차를 가기에 우리도 하다못해 ‘동전노래방’이라도 가자고 했더니 마누라가 그냥 쉬자고 한다. 나중에 알아본 사실인데 완도에는 아직 동전노래방이 없다고 한다.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다. 남해를 여행할 때는 새벽 5시 전에 기상을 했었는데 청산도 여행에서는 7시까지 버스로 가면 되어서 아침시간이 상당히 여유로웠다. 아침을 먹고 신지도에 있는 명사십리해수욕장을 가기위해 차를 탔다. 요즘에는 우연만한 섬들은 다리를 다 놓아서 전에처럼 배를 타고 이동하는 불편함은 해소되었다. 명사십리해수욕장은 모래가 너무도 고왔다. 길이도 3.8km여서 끝에서 시작하여 한 번 갔다 오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보면 발짝을 뗄 때마다 고운 모래가 발바닥에 닿는 기분이 꼭 양탄자 위를 걷는 것처럼 촉감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고운 모래에 해수욕장 뒤편으로 소나무 숲이 있어 해수욕장의 입지로는 너무도 좋았다.




우리는 강진을 가기위해 해상교량 길이가 1.3km되고 2017년에 개통한 장보고다리(일명:청해대교)와 고금대교를 건너 강진군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놓은 ‘가우도출렁다리’로 이동했다. 아침 시간인데도 이 길을 걷기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우도는 강진군에 있는 8개의 섬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사는 섬이기도 하다. 대구면 저두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저두↔가우도 출렁다리(438m)를 지나 거북이바위와 김영랑 동상을 거쳐 망호출렁다리(716m)를 넘어가 버스가 서 있는 주차장까지는 약 2.5km거리여서 천천히 구경을 하면서 걷는다고 해도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출렁다리라고 하지만 실제로 다리는 출렁거리지 않으며 해안가로 걷기 편하게 데크를 설치하여 주변경치를 감상하면서 걷기엔 이 보다 더 좋은 길을 만날 수가 없다. 이 길을 걸을 때가 한여름이 아니고 봄이나 가을이었다면 더 많은 칭찬을 해줬을 텐데 땡볕에 걷다 보니 표현에 인색함이 묻어있지 않았나 싶다.












강진에서 또 볼만한 곳으로는 순천만보다는 부족하지만, 해안습지에 자생하고 있는 갈대숲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지금은 땡볕에서 망둥어만 날뛰고 있는데 늦가을이 되어 갈대가 꽃이 피고 색깔이 누렇게 변하였을 때 오면 그런대로 계절에 맞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강진에서 가볼 데는 상당히 많이 있지만, 돌아가신 지가 180여 년이 흘렀어도 이조 오백년을 통틀어 정치, 사회, 경제, 지리, 철학, 문학, 군사학, 교육학, 의학 등 모든 부문에 걸쳐 500여 편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출중한 학자요, 개혁관리이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곳을 가보지 않을 수 없다. 다산 선생이 어렸을 때 15년을 살고,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와서 다시 18년을 살던 남양주의 마재마을도 갔다가 오기도 했었다. 다산 선생이 기거하던 다산초당은 백년사 길을 따라 올라오다가 옆길로 접어들어 산 고개를 넘어 1km 넘게 산길을 걸어내려 와야 한다. 이곳에서 18년이라는 그 긴 유배생활을 보내게 했으니 조선의 대학자를 너무 방치했다고 본다. 하지만 여기 계시는 동안 선생이 갖고 있던 지식과 축적된 경험을 살려 여러 부문에 걸쳐 많은 저서를 남겼다. 다산초당에서 약 1km 정도를 더 걸어 내려오면 좌측으로 다산박물관이 있다. 남양주의 다산 유적지에서 가서도 느꼈고, 이번 강진의 박물관을 돌아본 뒤도 느꼈던 것은 다산 선생이 대단할 만큼 위대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관리라는 것이다. 그 당시의 학문체계가 현실과 동떨어진 이기론(理氣論), 사장학(詞章學), 형식적인 예학(禮學) 등에 매몰되어 있었는데 이에 반성으로 17세기 중반부터 학문의 목적이 인간이 추구하는 생활의 필요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조선내부에서 서양의 자연과학문물을 접하면서 인지하였다. 이럴 때 정조임금은 다산 선생을 통하여 조선의 개혁을 서두르게 하고, 인간의 생활에 부합하는 학문을 연구하게 한 것이다. 실학을 간단히 말하면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을 일컫는다. 실사구시의 학문을 집대성한 조선 최고의 실학자인 다산 선생은 정조대왕이 돌아가시자 그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강진에 와서 18년이라는 긴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높은 학구열과 조선민족을 위해 많은 저술활동을 펼치면서 실사구시의 학문을 몸소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 조선 최고의 학자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멀리 강진에 와서 다산 선생의 유배생활을 엿볼 수 있어서 상당히 의미가 있는 여행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여행은 해본 사람이 하고 또 여행을 통하여 미지의 세계와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때로는 고단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보고 먹고 알아가는 즐거움이 더 큰 것만은 사실이다. 이번 여행은 동백여행사를 통하여 편안하고 즐겁게 여행을 마쳤다. 특히 풍부한 여행 경험과 지식으로 유창하게 안내를 하면서 꼭 말미에 우스개멘트로 승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이드 선생인 조부장에게 많이 수고하셨다는 말씀과 고마웠다는 인사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