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해가 길어서 여행하기가 가을보다는 훨씬 낫다. 오래전부터 처가의 처남들과 봄이 되면 봄 여행을 다녔는데 중간 중간에 해외여행을 하다 보니 어느 때는 건너뛰기도 한다. 올해는 바빠서 참석을 못한 큰처남 내외를 제외하고는 그 외 나머지 처남들과 처남댁들은 모두 참석을 하여 우리 내외를 포함하여 모두 8명이 이번에 강원도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구경을 하고 맛있는 식사도 사먹으면서 그동안 뜸했던 동지간의 우애를 다졌다.
울산에 사는 막내처남내외가 아침에 일찍 올라오느라고 고생은 됐지만 수도권에 3남매가 살다보니 내려갈 때보다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ktx가 있어서 여행을 하는데 많은 변화가 생겼다. 전에 같으면 차를 갖고 와야 했지만, ktx가 생겨서 울산에서 양평까지는 ktx를 타고 오고, 수도권에 사는 남매들은 양평역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다함께 만나 여행의 출발점이 되었다.
소양강은 몇 번을 갔지만 소양강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청평사는 아주 오래 전에 마누라와 같이 가본 적이 있다. 갔다 온 지가 30년 가까이 되어서 배를 타고 들어갔다가 배 출발시간에 맞춰서 나오느라고 부지런히 걸어 나왔던 기억은 뚜렷한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는데 이번에 들어갈 때 체크해보니 배타는 시간이 15분이고, 배에서 내려서 천천히 사진도 찍고 쉬면서 갔는데 40분 정도 걸렸다. 우리가 가는 날이 4월 초파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청평사를 찾았다.
오봉산 기슭에 자리한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년)에 창건하여 조선 명종 때 보우선사가 중건하여 대사찰이 되었다. 6·25전쟁 때 거의 소실된 것을 1970년대에 전각들을 짓고 회전문을 보수한 후 범종각과 요사채를 앉혔다. 청평사는 댐이 생긴 이후 ‘섬속의 절’로 유명해졌다. 들어가려면 여러 교통수단을 갈아타고 들어가기 때문에 젊은 연인들한테 각광받는 데이트코스이기도 하다. 절은 크지 않아서 둘러보는데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다. 청평사를 다녀 온지 4반세기가 지나 이렇게 처남들하고 다시 찾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점심을 일찍 먹고 소양강 건너에 있는 청평사를 다녀와서인지 오후 시간이 상당히 여유로웠다. 그래서 춘천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구봉산전망대로 이동하여 편안하게 차를 마시며 호반의 도시 춘천 시내를 보고 있다. 저 멀리 시내 끝으로 호수가 보이고 호수 위로 다리가 가로질러 놓여있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우리 일행이 하룻밤을 묵을 곳은 홍천의 대명콘도여서 그곳으로 이동하는 참에 홍천읍내 강가에서 나물축제가 있다길래 한 번 가보았다. 다들 산나물을 사갖고 가려고 기대를 하고 갔는데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나물 파는 부스는 여러 곳을 마련해 놓았어도 여기저기 둘러봐도 산나물은 아예 없고 집에서 키운 산마늘(명이나물)이 주로 많았고, 다른 나물들도 더러 있었지만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식당은 콘도에서 그리 많이 떨어져 있지 않아서 홍천장터에서는 한참을 이동해야 했다. 함께 여행을 하는 처남들도 이제는 다들 나이가 먹어 환갑이 지났기도 하고, 환갑이 가까이 된 처남도 있는데 젊은 친구들처럼 맛있는 식사를 위해 직접 인터넷을 뒤져 맛집을 찾아 예약했으니 성의가 놀랍지 않겠는가. 점심 식사할 때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더니 역시 저녁때도 많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저녁에는 오리백숙과 닭볶음탕이 주 요리인데 새(닭·오리)종류는 먹지 않는 사람이 있어 주요리 외에 별도의 요리를 시켜서 아주 푸짐한 식사를 했다. 홍천의 옥수수막걸리로 건배를 하며 놀러온 기분을 한껏 돋우었다. 식당에서 시작한 반주는 자리를 옮겨 숙소에 와서도 밤늦게까지 이어지다가 막걸리와 맥주 등 갖고 온 주류가 거의 동이 나서야 끝이 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년에 몇 번은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드니 이런 행사를 일부러 만들지 않으면 좀처럼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으며, 술잔을 부대껴 건강을 기원하고 동지간과의 우애를 다지던 주말 밤은 이렇게 저물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햇살이 밝다. 어젯밤 콘도에서 내려다본 밤풍경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바로 앞에는 파3골프장이고 그 건너로 물놀이장이다. 오래전이기는 해도 여동생 내외하고 이곳에 와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일어나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사용하고 하절기에는 파3골프장으로 이용하는 언덕배기에 올라 공을 치고 내려온 적도 있었다. 대명콘도는 다른 콘도에 비해 몇 번 와서 크게 낯설지는 않은데 이번에 우리가 묵었던 콘도는 새로 지어 한 개 층이 4개 팀만 들어오게 해서 조용했다. 그리고 숙소 동 앞에는 평지에 잘 관리된 파3골프장이 있어 골프를 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치고 싶은 욕심이 든다.
아침은 콘도 앞에서 해장국으로 한 그릇씩 먹고는 남이섬으로 이동했다. 홍천 대명콘도에서 남이섬입구의 선착장까지는 차가 군데군데 밀려서인지 거리는 45km가 채 안되는데도 1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요즘의 남이섬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권에서는 꽤 유명한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오래전에 내가 갈 때만해도 이렇게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는데 일본사람들이 ‘겨울연가’의 촬영지가 남이섬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일본인들이 배용준을 가르켜 ‘욘사마(勇さま)’라는 극존칭어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있던 터라 주로 일본 관광객들이 남이섬을 많이 찾았는데 요즘은 중국 사람들과 동남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우리가 가던 날도 꽤 많은 중국 사람들이 그곳을 찾았다.
남이섬은 가평읍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북한강 가운데 있는 섬이다. 서울 여의도가 한강 가운데 모래가 쌓여 생긴 섬이라면 남이섬은 처음에는 육지였는데 청평댐을 막자 주위가 물이 차오르면서 생긴 섬이다. 남이섬의 유래는 남섬(南島)이라고 불리어졌다가 민병도옹이 1965년 한국은행 총재직을 그만 두고 퇴직금으로 이 섬을 사들이고 나무를 심기시작하면서 지금의 남이섬이 있기까지의 시발점이 되었다. 남이섬의 명칭은 남이섬 북쪽 돌무더기에 남이장군이 묻혀 있다는 민간전승에 기인하며 실제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서 ‘천우기행’과 ‘산수심원기’에 남이섬을 남이섬(南怡), 남이서(南怡嶼)라는 기록도 있다. 민병도옹은 1965년 이 섬의 조성초기에 남이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장군의 높은 기상을 기리기 위해서 돌탑 주위에 봉분을 쌓고 추모비를 세워 지금도 남이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남이장군의 행정상의 진짜 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위치하고 있다. 남이섬의 크기는 약 13만 평에 300여 종의 동·식물(나무)들이 서식하고 있다. 볼거리가 많지만 아름드리의 소나무길, 메타쉐케어길, 은행나무길 등은 일품이고 강을 보며 강가로 나있는 흙길도 상당히 걷기가 좋다. 시간이 있을 때 다시 한 번 남이섬을 찾아서 이 섬을 이렇게 아주 훌륭하게 가꾸어 놓으신 민병도 선생께 돌아가신 지가 13년이 되었어도 꼭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고 싶다.
점심은 남이섬에서 청평 쪽으로 한참을 내려오다 호명산 자락에 붙어있어 아는 사람만 가고, 연예인들이 살짝 들렀다간다는 ‘하늘땅 별땅’맛집에 가서 더덕구이와 잣묵사발로 점심식사를 했다. 시내에서 너무 먼데다가 산속에 있는데도 맛집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온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특별한 아이템과 독특한 맛으로 산속까지 맛객들을 불러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보였다.
처남들과의 1박2일의 공식적인 모든 여행 일정이 끝났다. 울산에 살면서 이 먼데까지 올라와 우리의 모든 행사를 주관하여 아무 탈 없이 마무리해준 막내처남 내외에게 고생했다는 말과 여기저기 우리를 태우고 안전운행하면서 온갖 추억거리를 만들어준 둘째 및 셋째처남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여 본다. 참, 둘째 처남댁과 셋째 처남댁에게는 맛있는 음식 많이 준비해주셔서 고맙고 잘 먹었다는 말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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