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OB회원들과 전주 한옥마을을 가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19. 6. 4. 15:08




봄이 다 끝나갈 무렵인 지난 주말에 전주 한옥마을을 가기 위해 모임의 회원들과 광명역에 가서 ktx를 탔다. 전주까지는 1시간 남짓 걸려서 전주에 가서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가 있었다. 전에 같으면 당연히 관광버스를 대전해서 간다고 했을 텐데 ktx가 생기고부터는 여행문화도 많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다소 비용은 더 들지만 긴 거리를 단 시간에 편안하게 이동하는데다 짧은 여행시간에 더 많은 곳을 가볼 수가 있으니 교통수단으로써는 그보다 나은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번여행은 전주에 가서 한옥체험을 하기 전에 군산의 새만금방조제를 건너 선유도에 들렀다가 나오는 길에 부안의 채석강까지 돌아본 얘기를 하고, 한옥체험은 나중에 하려고 한다.


전주역에 도착하니 우리를 태울 관광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버스로 갈아타서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듯이 점심식사를 위해 진안방향으로 약 30여분 정도 달려간 곳이 두부요리를 전문적으로 하는 대형식당인 ‘화심순두부집’이었다. 주차장도 널찍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룸이 여러 개가 보였는데 그 큰 룸에는 많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각 테이블 위에는 자르지 않은 네모난 생두부가 올려져 있어서 먹으려면 손수 잘라서 먹어야 했다. 먼저 두부 맛을 보니 옛날에 시골에서 명절 때나 직접 손 두부를 만들어 먹던 시절의 그 맛과 흡사하여 많이 놀랐다. 다시 한 번 맛을 봐도 담백하면서도 진한 콩국물이 깊게 스며들어서인지 먹고 난후에도 구수한 맛이 한참이 갔다. 두부 맛을 본 후 본 음식인 순두부는 양념이 들어가서 본래의 순두부의 담백함은 떨어졌지만 맛은 배로 증가했다. 전주에 와서 첫 번째 식사를 두부 요리로 해결한 뒤 선유도를 가기위해 군산으로 이동했다.


옛날만 해도 선유도를 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했는데 새만금방조제가 생기고부터는 차로 쉽게 갈 수가 있다. 20여 년 전에 필자가 선유도를 갈 때만 해도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갔었다. 새만금방조제는 경기도 안산에 있는 시화방조제하고는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거리가 33km인데다가 김제시, 군산시, 부안군 등 3개 시군이 바닷길로 연결되어 쉽게 왕래할 수가 있게 되었다. 선유도는 신선들이 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바닷물과 모래가 깨끗하고 주변경치도 수려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 잔뜩 기대를 하고 갔는데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데다가 해수욕장 공중으로는 줄타기가 생겼고, 눈이 부시도록 빛나던 흰모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서 다시 찾는 선유도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선유도를 둘러보고 나오다 보니 격포가 나오고, 낯이 익은 바위언덕이 있어 같이 온 일행한테 여기가 부안의 채석강과 비슷하다고 했더니 바로 채석강이라고 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새만금방조제가 생기고 전북의 서해 바닷길이 열리면서 세월을 뛰어넘어 거리·시간의 변화를 금방 느낄 수가 있었다.


여행은 보고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먹는 즐거움도 있어야 한다. 저녁 식사는 전주에서 한식으로 아주 유명하다는 ‘호남각’에 가서 반주도 한 잔하면서 오랜만에 여유롭게 호남지방에서의 풍미를 느껴보기도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우리가 전주에 오게 된 가장 큰 목적이 한옥체험인 만큼 한옥마을로 이동했다. 식당에서 한옥마을까지는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꽤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우리 나이 또래에서는 어린 시절 초가집에서 자랐고, 잘 사는 사람들이 기와집에 살 정도였으니 한옥 기와집에 대한 동경이 마음속에 늘 남아 있었지 않았나 싶다. 나이를 먹게 되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얘기가 있다. 나도 70이 다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어린 시절 그리움은 나이가 먹을수록 더 진하게 가슴과 기억에서 되살아난다. 이건 비단 나뿐만 아니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우리 일행은 깜깜한 밤이 되어 숙소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인원이 30여 명이 되다 보니 ‘싸목싸목’과 ‘귀거래사’ 한옥 두 채를 통째로 빌려 투숙하여 한옥체험에 들어갔다.


체험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전주의 한옥마을에 대한 유래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근대식 한옥을 짓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한옥마을의 모태(母胎)가 되었다. 1977년 이곳 일대가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면서 비교적 한옥은 잘 보존된 반면, 마을은 급격히 공동화(空洞化)되어 집이 무너져도 손볼 수가 없자 주민들 반발이 심하여 1987년 한옥보존지구를 제4종 미관지구로 바꿔 건축규제를 완화하였다. 10년 후 1997년 도시미관지구가 폐지되면서 양옥이 들어섰으나 IMF영향으로 한옥이 크게 훼손되지 않고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1996년 한일월드컵이 결정되고, 이듬해 전주가 개최도시로 선정되면서 전주의 한옥마을에 대한 보존필요성이 대두되어 1999년 전통문화특구 기본사업계획이 작성되었다. 세계인이 전주를 찾아올 때를 대비해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보여줌으로써 전주의 위상을 세계로 알리자는 큰 뜻이 현실화하여 보기 좋은 한옥이 늘어나고 다양한 체험시설이 생기는 등 크고 작은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2016년 ‘론리플래넷’이 1년안에 꼭 가봐야 할 아시아 10대 명소 중 3위에 선정되기도 했을 만큼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화관광명소가 되었다. 2017년 말 현재 누적관광객수가 1,100만 명을 넘어섰다.


한옥의 대청마루에 들어가니 맨 먼저 은은한 나무냄새가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나 일반 주택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한옥과의 첫 만남이다. 내가 묵을 곳은 ‘싸목싸목’이라는 한옥인데 대청마루가 널찍하게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고, 양쪽으로 나뉘어 크고 작은 방 네댓 개가 있다. 집구조가 대들보와 서까래가 눈으로 훤하게 보이는 것이 충북 미원에 있는 나의 고향 시골집과 비슷한데 이곳은 투숙객을 더 받기 위해서 방을 편의적으로 더 늘렸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작은 방은 2인씩, 크다는 방은 4-5인이 자도록 조를 짜서 방 배정을 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조그만 벽거울이 보이고, 깨끗한 수건이 서너 장이 잘 정돈되어 놓여있다. 화장실로 들어가니 양변기와 세면기가 있고, 세면기 옆으로 샤워기가 있어서 급할 때는 간단히 샤워도 가능해 보였다. 대청마루에서는 차도 마시기도 하고 벌써 소주잔을 부대끼는 소리도 들렸다. 다들 정년퇴직하고 수도권에 사는 친구들은 그나마 가끔 보지만, 지방에 사는 회원들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아예 만날 수 없다보니 오랜만에 만나 소주잔을 부딪치어 장단을 맞추고, 옛날 얘기로 안주하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다가 늦은 시간에 잠을 청하러 방으로 갔다. 60년 전후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때의 꿈을 꾸길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그렇게 오래 많이 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데도 몸이 가뿐하고 상쾌한 아침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있는 아침을 전주 한옥마을에서 맞고 있다. 아침식사를 위해서는 ‘왱이콩나물국밥’집까지는 반시간 가까이 걸어야 했다. 어제는 밤이라 보지 못했던 한옥들이 쉽게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전주에 와서 이처럼 한옥을 보면서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 중·후반만 해도 서울 제기동에 가면 잘 지은 한옥들이 질서정연하게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직접 어젯밤을 한옥에서 자고 한옥마을을 이렇게 실제로 눈으로 보며 아침시간에 이 길을 걷고 있는데 어찌 행복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행복한 아침이었다. 여행을 해본 사람들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이런 즐거움 때문에 여행은 계속되는 것이고, 이래서 전주 한옥마을도 아주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을 ‘왱이콩나물국밥’으로 어젯밤의 숙취를 달래고는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국보 317호)가 있는 어진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일요일인데도 많은 관람객으로 북적이지 않아서 어진박물관내의 소장품들을 소상히 돌아볼 수가 있었고, 박물관 밖의 정원도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었다.


점심식사는 육회비빔밥으로 유명한 어진박물관 옆의 ‘전주집’에 가서 전주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1박2일의 모든 행사를 위해 사전답사도 하시고, 잘 곳과 먹을 식당도 예약하시고, 필요한 물품도 구매하시는 등 많은 고생을 하신 허성진 사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모든 회원께서 건강하게 잘 있으시다가 다시 뵙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