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역사기행」경기 화성에 용주사와 융건릉을 가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17. 11. 19. 17:07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해서 수레바퀴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수레는 지나갔던 길을 되돌아올 수도 있는 반면에, 역사는 한 번 지나가면 절대로 지나간 길을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다르다. 이렇게 역사는 하루하루가 지나서 과거가 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이 반복되고 있어도 순간순간이 다 다르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수레바퀴에 비유하는 것은 그렇게 표현한 사람들이 깊은 뜻이 담겨 있어서인지 보통 사람들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계절을 수레바퀴에 비유한다면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역사기행은 이조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불행한 왕조시대의 한가운데 있었던 융(사도세자)·건(정조대왕)릉을 가 보았다. 융건릉은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전철 병점역에 내려서 2번 출구를 빠져나가면 용주사와 융건릉을 가는 시내버스가 34번, 34-1번, 46번, 50번 등이 있고, 1000,1001번의 직행버스와 마을버스 35-1,2,3,4번 등이 있다. 어느 버스를 탄다고 해도 융건릉 입구까지는 병점역에서 10분 남짓 걸린다.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 갈양사로 창건되었고, 고려 광종 때 증·개축을 하여 수륙도량이라 칭하였으나 잦은 전쟁으로 소실되어 방치되었던 터에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님의 크고 높은 은혜를 설명한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1762년 뒤주에 갇혀 돌아가신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 부자간에 애틋한 마음을 달래고 기리기 위해서 절을 지었다. 절 이름은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 밤에 정조대왕이 꿈을 꿨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이었다고 해서 용주사로 불리었으며 효행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져 오늘에 이른다.


용주사 들어가는 초입 중앙으로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홍살문(궁전,관아에 세워 경의를 표하게 함-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위패 모심)”이 눈에 들어오고, 우측으로 붉게 물든 단풍이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우리는 역사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경내로 들어가다 보니 조지훈 선생의 ‘승무’시비가 눈에 들어오고 좌측으로는 효행박물관이 있다. 좀 더 걸어 들어가면 삼문(三門)이 나온다. 삼문은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고 오직 용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데 각 기둥에 ‘용주사불’로 시작되는 주련이 걸려있어 가는 이로 하여금 걸음을 멈추게 한다. 천보루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정면으로는 대웅보전이 있고, 대웅보전 앞의 5층 석탑에는 부처님의 사리 2과가 봉안되었다고 한다. 대웅보전으로 들어갈 때는 이름이 천보루였는데 다 들어가서 뒤돌아보면 ‘홍제루’로 명칭이 바뀌어 있다. 홍제루는 세상사람들을 널리 구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 중생을 살핀다는 부처님 말씀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싶다. 절 안쪽으로 들어가니 스님의 염불소리가 큼직하게 들린다. 대웅전 안쪽에는 대학 입시철이라 불공드리는 불도들로 가득 찼다. 효를 중시하는 사찰답게 여기저기에 효와 관련한 문물을 볼 수가 있다. 대웅전의 ‘삼세여래후불탱화’는 조선후기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가 그리고, 스님 200명이 함께 거들어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호성전은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위패를 모셔놓고 있으며 부모은중경탑은 비석에 그림과 글씨를 새겨서 일반 백성들이 효를 하는데 참고로 하도록 했다. 그뿐이겠는가. 효행박물관은 정조대왕의 남다른 효심을 엿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용주사에서 융건릉 입구까지는 버스로 두 정거장이고, 걸어서도 10분이 채 안 걸린다. 융건릉 출입구에서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융릉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0분 남짓이면 충분하고, 들어가는 길 내내 평일이어서인지 한적하기만 하다. 간혹 소나무 숲을 지나갈 때도 있지만, 걷는 길 양쪽으로 곧게 뻗은 참나무 숲에서 낙엽이 떨어져 수북하게 쌓여 있어서 낙엽을 밟을 때마다 가을이 저만치 가는 것을 아쉬워하기에 충분했다.


산 중간부분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융(사도세자)릉이 멀리서도 왕릉임을 알려주었다. 릉 올라가는 왼쪽으로 둥근 모양의 ‘곤신지’가 있다. 곤신지는 릉에서 볼 때 남서방향이고 처음 보는 물이며 풍수지리설에 물이 있어야 좋다고 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연못이다. 사도세자는 조선 21대 왕인 영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만 27세의 젊은 나이로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었다. 부자간에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고 원한이 있다고 해도 아들을 굶겨 죽일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영조 25년에 사도세자의 나이 14-5세 때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어릴 적에 소론파 학자한테서 학문을 배운 것을 좋지 않게 보아왔던 노론파 측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노론이 강세였던 시절에 노론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것은 대리청정하는 세자의 입장에서 볼 때 좋게 작용할리가 없었다. 1761년 계비 김씨의 아비인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의 세자비행 10조목 상소로 영조는 세자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의 잘못된 판단과 당파싸움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다. 영조가 뒤늦게 후회했다는 얘기가 있는 걸 보면 조선 500년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닌가 싶다.


사도세자가 죽고 나서 두 달여 만에 경기도 양주 배봉산, 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에 장사를 치루고 배봉산에 묻혀 있던 사도세자를 죽은 지 27년 만인 1789년 정조 13년 되던 해에 지금의 경기 화성시 안녕동으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른다.


정조대왕이 잠들어 있는 건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융릉에서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다시 건릉으로 올라가는 길이 빠르지만, 우리는 올라간 길을 조금 내려와서 좌측으로 길머리를 잡고 융릉 옆으로 나있는 산 능선 길을 타고 빙 둘러서 가기로 했다. 능선을 따라 가는 길이 참나무 낙엽이 발목이 빠지도록 쌓여 있어서 발짝을 뗄 때마다 시끄러울 만큼 바스락거린다. 그 길을 한참 걸어서 산 능선으로 올라서면 참나무 숲은 어디 가고 없고 굵은 소나무 숲이 이어졌다 끊어지고를 반복한다. 빽빽한 소나무 밭을 지날 때는 떨어진 솔잎이 쌓여서 마치 스폰지 신발이라도 신은 듯 푹신푹신해서 좋다. 그렇게 소나무 숲을 걸어서 산 중간 정도 내려오면 굵고 미끈미끈한 참나무 숲이 다시 나오는데 쌓여있는 낙엽이 걸어 내려오는 내내 같이 얘기 좀 하자고 불러대는 것을 뿌리치다 보면 좌측으로 정조대왕의 건릉이 보인다. 건릉은 융릉에 비해 규모가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대왕의 묘답게 위엄이 있었고 편안해 보였다. 돌아가신 지가 200여 년이 지난 비록 무덤이기는 해도 대왕의 큰 뜻과 백성을 위한 선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정조대왕은 조선 21대 왕인 영조의 손자로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22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과인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할아버지의 탕평책을 이어 받아 발전시켰으며 규장각을 두어 학문연구에도 열중하였다. 특히 수원 화성을 건축하여 조선중흥을 이끈 대표적인 대왕중의 한 분이다.


정조가 설치한 규장각은 역대 왕들의 문적과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들을 보관하고, 재주 있는 젊은 학자들이 이곳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정조 자신도 가끔 그곳에서 학자들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며 학문을 논하곤 했다. 규장각에는 ‘초계문신(抄啓文臣)’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문신을 가려 뽑아 규장각에서 공부시킨 후 시험을 보고 성적이 좋으면 벼슬자리를 주는 것이었다. 초계문신은 신진 정치 엘리트로 당파에 휩쓸리지 않는 정조의 친위 세력이 되었다. 여기에서 배출된 이가 이가환과 정약용이다. 정조는 정약용을 아껴 중국에서 들여온 책을 선물하기도 하고, 시골 수령으로 보내 지방 실정을 알아 오게도 했다. 정조의 이런 배려로 정약용은 실사구시의 학문을 많이 연구하여 우리의 실제생활에 도움을 주도록 노력하였다. 또 서자 출신이라 해도 재능이 있다면 등용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들이 정조대왕을 통하여 배출되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조의 재위 24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조(1752~1800)가 48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조선이 쇠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안타깝다. 정조가 더 좀 사셔서 조선왕조를 탄탄하게 다져놓았다면 지금보다 더 강하고 잘 사는 대한민국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우성회 소분과 모임인 역사기행팀에서 11월 역사탐방을 경기 화성의 용주사와 융건릉을 간다고 해서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와 보고 참으로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삶 중에서 ‘효는 근본이다’라는 것을 새삼 느꼈고, 말로서 듣고, 글로서 보던 지식을 직접 와서 식견을 넓혀 조선 후기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한걸음 다가섰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가을이 끝나갈 무렵 낙엽이 떨어진 산길을 걸어서 건강까지 챙겨준 것으로 모자랐는지 ‘한국인의 밥상’집으로 안내해 근사한 식사를 하게끔 장소와 일정을 맞춰 주신 김재화 회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이 모두가 순전히 김 회장님의 덕분임을 마음에 담는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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