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영면하시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18. 12. 26. 16:26




지난 2018년 12월 23일 23시 03분에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영면에 드셨다. 2015년 7월 말에 병원 응급실을 찾으신 이래 3년 5개월을 병원 중환자실과 요양병원 등을 오가며 끈질기게 투병생활을 하시던 어머니께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시고 97세의 일기(一期)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그동안 짧지 않은 투병생활에 본인의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만, 묵묵히 참고 내 곁에 계셔준 어머니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런 어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장례를 치룬지 만 하루가 되지 않았는데도 어머니가 보고 싶어지면서 그리움이 밀려오고 가슴이 아파오더니 어디에 숨어 있다가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이 하나 둘씩 주마등처럼 머리에 떠오르고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중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필자가 중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와 같이 집에서 큰 고개를 넘어 십리가 넘는 산길을 참외를 사갖고 자루에 담아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나는 등에 짊어지고 어린 동생들을 먹이기 위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산 고개를 넘었던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 고갯길이 지금은 굽이굽이 돌아 차가 다니지만 그 때는 너나나나 다 걸어서 넘어야 했다. 그 고개가 충북 청주에서 유명한 초정과 미원을 연결해주는 ‘이티봉’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이티재’라고도 한다. 우리가 살던 곳에서는 미원이 가까웠지만, 미원보다 더 먼 증평장이나 내수장을 자주 이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유는 미원 장보다는 농산물 가격이 더 높게 쳐줘서 그리로 가지 않았나 싶다. 여러 형제들을 키우다보니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터라 되도록 한 푼이라도 더 받는 데를 찾다가 보니 다리품을 많이 파셨다. 특히 어머니가 더 고생을 하신 것은 아버지가 충북 영동에서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중년에 고향에 돌아오셔서 농사일을 남들처럼 하시지 못해 논과 밭은 남들보다 더 많았지만, 늘 일하는 사람을 사서 농사를 짓다보니 어머니는 일꾼들 밥해대느라고 농사철이면 한시도 마음 편하지 못하셨다. 그런 어머니였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어머니가 어디 친척집에 가고 싶다고 하시면 만사를 제쳐놓고 모시고 가기도 하고, 또 여행을 갈 때면 국내여행이기는 해도 함께 다니기도 했었다. 다시는 어머니와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픔이 턱까지 차오르며 숨이 막힐 정도로 눈물이 쏟아진다.


“엄마, 정말 미안해~~ 엄마 생전에 건강하셨을 때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이라도 한 번 갔어야했는데 그것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리고.... 또 화낸 것도 정말 잘못했어요. 그래도 엄마 아들로 태어나서 많이 행복했고 자랑스러웠어요. 이제 근심걱정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하게 잠 드셔요. 엄마! 많이 사랑했어~~” 


내 입장만 생각하다 보니 인사가 늦었네요. "연말이 다가오고 성탄절이라 다들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직접 빈소를 찾아와 망자의 명복을 빌어주시고, 상주의 슬픔을 위로해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기해년 새해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더 건강하시고, 행복한 한해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