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총통 기념관 앞에서 단체사진
비내리는 차창에서 본 담수하
비내리는 차창너머로 본 송미령호텔(그랜드)
충렬사 앞에서 단체사진
위병교대식
박물관 앞에서
용산사 전경
용산사 앞 야시장
기차 안에서 찍은 모를 심은 논
타이베이 역 앞 마스코트
장춘사 앞 개울
225위의 위패를 모신 절
처남댁들과 마누라
협곡
원주민의 구름다리
대협곡의 큰처남내외의 다정한 모습
자모교에서 한껏 폼잡고......
아미족 원주민공연
101층 전망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시내
구분광산 상가
야류생태공원
엄청 다정해 보이는 둘째처남 내외
장총통 집무실
행복한 밤
마누라와 같이
막내 처남 내외
구분광산 상가
야류공원의 돼지코
대만까지는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2시간 4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대만에 오면 상당히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고 비행기에서 내리니 하늘에는 시커먼 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스산한 바람은 꼭 늦가을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국이나 대만이나 기온은 별 차이 없어 보였지만, 그런데도 산과 들은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도원공항에서 대북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언덕에는 붉은 빛깔의 영산홍이 활짝 피어 우리를 맞이했다.
대만의 여행얘기를 하기 전 대만에 대해서 알아보자. 대만의 인구는 2,300만이고, 수도인 대북에는 약 260만 명이 살고 있다. 국토크기는 남한의 삼분의 일이고, 대북은 서울의 서너 개구를 합친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대만은 지형이 동고서저(東高西低)로 작은 섬인데도 불구하고 3,000m급의 산들이 무려 268개나 될 만큼 높은 산이 많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건국한지 올해 100주년을 맞게 된다고 한다. 민족은 한족이 98%이고, 2%정도는 원주민을 포함한 소수민족이다. 기후는 아열대기후이고, 겨울이 우기라서 비가 잦다. 또 대만의 남북의 길이는 약 390km이고, 동서로는 좁은 지역이 140km 정도다.
대북을 들어가려면 서울의 한강보다 약간 적은 담수하를 건너야한다. 담수하를 건너 얼마 안가면 좌측으로 산입구에 장개석총통의 부인 송미령씨가 지었다는 황금색깔의 그랜드호텔이 금방 눈에 들어오고, 오른쪽 멀리로는 대북의 상징인 101층 금융센타빌딩이 우뚝 솟아있다.
타이베이에 오자마자 우리는 충렬사로 바로 갔다. 충렬사는 우리나라의 국립 현충원과 같이 대만에서도 애국지사와 전쟁 시 전사한 군인 위패를 모셔놓고 영혼을 달래며 넋을 기리는 곳이다. 위병교대식은 아무데서나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행해져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음으로 이동한데는 중국의 긴 역사와 더불어 남겨진 값진 보물을 보관해 놓은 타이베이 국립박물관이다. 박물관에 들어가니 손문선생의 흉상이 정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손문 선생은 ‘삼민주의’ 즉 민족, 민권, 민생주의를 통한 중화민국의 개혁과 개방을 이끈 인물이다. 장개석총통의 손위 동서이기도 하다. 박물관에는 67만 여종의 보물이 소장되어 있지만 그중 15,000여종만 진열해 놓았다고 하는데 제대로 둘러보려면 꼬박 2-3일이 걸린다고 한다. 장개석장군이 공산당인 모택동의 군대에게 패해서 지금의 대만으로 쫓겨 올 때 중국 본토에 있는 국보급 보물을 다수 갖고 와서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3층부터 우리는 보기 시작했다. 3층에는 청동기유물과 신석기유물이 주종이다. 또한 2층에는 송나라 백자와 명.청조의 청자가 진열되어 있고, 여러 색깔의 도자기도 눈에 띄었다. 2층 왼쪽으로는 서예와 서화가 잘 보존된 채로 진열된 것을 볼 수가 있고, 1층으로 내려오니 명. 청조의 가구와 살림살이가 있어서 둘러보았다. 역사가 긴 민족이 남긴 보물은 정말로 대단하고 찬란했다.
저녁식사를 하고는 시내 한복판에 있는 도교사당인 용산사를 찾았다. 절은 아주 호화스럽다. 절 입구에 다다르자 짙은 향냄새가 코를 찌른다. 저녁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교는 송대 이후 중국민간신앙의 대상이 무관(군인)은 우리가 읽었던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자는 운장)장군을 신으로 모시고 있고, 또 문관은 공자님을 신으로 모신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석가모니를 모시는 불교와 완연하게 구별된다. 용산사에는 연기가 자욱할 정도로 향이 피워지고, 신께 받친 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잠시이긴 하지만 대북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가 있었다.
도교사원에서 나와 길을 건너니 바로 야시장이다. 먹는 음식부터 하찮은 기념품까지 구색을 맞춰 있을 건 다 있었다. 시장은 크지 않아서 20분 남짓 둘러보니 더 둘러볼 데가 없었지만, 저녁시간인데다가 또 용산사를 들렀던 관광객까지 합세하니 시끌벅적하여 사람 사는데 같았다. 이렇게 잠시이기는 하지만 저녁 늦게까지 타이베이 사람들의 시장문화를 살펴보았다.
이튿날 아침이다. 오늘은 타이베이역에서 기차를 타고 화련을 가기로 했다. 타이베이에서 화련의 신성역까지는 2시간 40여분이 걸렸다. 이렇게 해외여행을 와서 기차여행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은데 이번에는 기차를 타고서 여유롭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대만의 산과들, 바닷가로 이어졌다 끊어지고를 반복하는 사람사는 시골동네를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와 농경문화가 같은 것은 물을 가둬놓은 논에다 모를 심어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5월에나 돼야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가 두 달 정도 빨라 보였다.
때 이른 점심을 먹고는 태로각 협곡으로 이동했다. 여기에 길을 내기위해 1945년부터 1949년까지 3년 9개월 동안 연인원 40만 명을 동원해 이 길을 뚫었다고 한다. 장춘사는 시내에서 약 10여분 거리에 계곡에 있다. 그곳에는 당시 공사를 하면서 죽은 225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불상이 있고, 늘 분향을 하게 해놓았다. 나는 꺼진 향에 다시 불을 붙여 그들의 혼을 달래주었다. 태로각 협곡에는 원래 길을 내기 전에는 아미족이라는 원주민이 사냥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아미족은 모계사회를 구성하고 살았으며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였다고 한다.
장춘사에서 나와 협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연자교가 있다. 연자교를 설치해놓으면 무너지고를 반복해서 고민하다가 조상 꿈을 꾸고 꿈의 계시대로 해보니 성공하여 다리 끝에 조상님께 감사함을 표시한 조그만 집이 있다. 좀더 올라가니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해 대만을 할애 받아 50년을 통치했는데 그때 시절에 건설했던 댐이 나온다. 지금은 발전하지 않고 담수역할만 하고 있다. 물은 횟가루가 녹아 내려서 희뿌옇다. 가파른 절벽 바위에 구멍이 군데군데 나있다. 이걸 보고 연자구라고 한다. 제비들이 여기서 알을 낳고 부화해 새끼를 키운다고 해서 연자구라고 한다. 가파른 계곡 쪽으로 길게 출렁거리는 다리가 놓여있다. 이 다리가 아미족이 사냥하러 갈 때 건너던 구름다리라고 한다.
가파른 계곡을 따라 올라오니 구불구불하다는 구곡동계곡이 나왔다. 그곳에 다리를 놓고 다리 이름을 지으려고 하니 늘 공사할 때 노파가 나와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사연을 알아보니 자기 아들이 중죄를 지어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공사가 시작되고 여기 와서 일을 한다고 하여 한 번 만나보기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공사에 투입된 사람들이 대부분 중범죄자들이었다. 대만의 2대 총통인 장경국이 그 말을 듣고 자기 모친을 생각하며 ‘자모교’라고 다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자모교를 지나서 바로 좌측으로 정자가 하나 나오고 도보 투어는 여기서 마쳤다. 차편으로 계곡길을 더 올라가 하늘만 보이고 물소리만 들리는 태로각 대협곡휴게소에서 우리는 불루베리차에다가 현지에서 채취를 했다는 꿀을 진하게 타서 마시며 쉬었다. 그리고 터널과 계곡으로 난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하산해서는 ‘남도문화극장’에 가서 원주민들의 유희문화를 잠깐이나마 접해 보고, 끝날 때쯤에는 그들과 한패가 되어 어울리기도 했다.
화련에서 대북으로 올라올 때는 급행을 탔는지 통과하는 역이 더러 있었다. 어제부터 잔뜩 찌푸렸던 날씨는 언제 비가 오기 시작했는지 창가에 빗방울이 맺히고 밖에 길바닥이 젖어 있다.
대만에 와서 또 다른 아침을 맞는다. 오늘은 타이베이에 있는 101층 전망대를 가기로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북의 전망대가 세계에서 가장 높았으나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두바이전망대가 요즘에는 가장 높다고 한다. 밑에서 목을 바로 젖혀도 끝을 보려면 한참을 젖히고 있어야 끝을 본다. 그렇게 어렵게 목을 젖히고 나면 목이 뻣뻣하고 조금은 어지러움이 있다. 1층에서 꼭대기까지 바로 올라가지 못하고 5층까지 이동해서 거기서 급행 엘레베이트를 타는데 날씨가 좋아야만 꼭대기 전망대까지 올라가고 오늘처럼 날씨가 좋지 못할 때는 88-9층까지만 올라가서 거기서 대북 도시를 동서남북으로 돌아보게 된다. 여의도에 있는 우리나라의 전망대보다는 훨씬 높아서 대북의 모든 곳을 대부분은 볼 수가 있다.
대북의 전망대를 나와서는 비가 우산을 쓰지 않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내리는 가운데도 구분광산으로 이동을 했다. 버스로 이동을 하다가 언덕이 있는데 가서는 구분광산에서 제공한 버스로 갈아타고 10여분 남짓 산 정상부분으로 이동을 했다. 구분광산은 원래 금을 캐던 광산이었는데 금을 캐던 광부들이 살던 데를 관광지화 해서 지금은 대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었다. 비탈진 언덕길에 조그마한 가게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먹는 것, 입는 것, 가지고 노는 것, 기념품을 사는 것, 잡동사니 등 없는 것 없이 있을 만한 것은 다 있다.
다시 거길 빠져 나와 한참을 버스타고 달렸다. 비는 세게 내리기도 하고, 또 덜 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내리는 비를 맞고 온 곳이 야류생태공원이다. 이 야류공원은 대만에 와서 여기저기 본 곳 중에서는 가장 경치가 좋았다. 화산활동으로 일그러진 여러 형태의 괴이한 대리석과 흙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풍수에 깎여 나가고, 강렬한 햇볕에 빛이 바래 괴이한 모습으로 군데군데 수를 셀 수 없이 많이 서 있다. 바다에서 강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파도는 그리 높지 않은 바위에 부딪쳐서 흰 물거품을 쭉 밀어 올렸다가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이렇게 바람도 세차게 불고, 비가 오는데도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오랜 시간을 내리는 비를 다 맞으며 그곳에서 보내었다.
다시 대북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일부러 가이드선생한테 얘기를 해서 아구병과자가게를 들르게 하여 적게는 두세 개 많게는 네댓 개를 샀다. 타이베이에 와서는 대충문이라는 장총통(본명:중정)의 기념관을 들렀다. 장개석총통은 손문선생의 부하로 있으면서 손문선생의 신임을 받아 중화민족의 대업을 이루는 듯 했지만, 공산당이 창궐하면서 모택동한테 쫒겨 조그만 섬인 대만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래도 세계에 있는 화교들이 장총통의 사후에 모금을 하고 대만 정부에서 얼마를 지원해서 이 기념관을 만들었다. 나는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장개석총통과 박정희 전 대통령 사이로 김종필씨가 있는 사진을 발견하고는 우리나라하고는 사이가 원만했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대만의 여러 곳을 다녔다. 이번에 대만을 가게 된 것은 처가식구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아이 엄마 형제들과 같이 갔다. 원래 오래전부터 국내여행도 여기저기 같이 하고 지금은 중단됐지만 금강산도 갔다 오기도 했다. 또 이번처럼 외국 여행도 하고 그런다. 처남들과 처남댁들한테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이렇게 내 블로그에 사진과 글을 올려본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배려해주신 처남 내외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여러 가지 여건이 안 좋았는데도 끝까지 자세한 설명과 친절한 안내를 해주신 평안여행사의 최용원 선생께도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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