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상으로 가을의 한 가운데라고 볼 수 있는 9월의 하순에 와 있다. 한낮으로는 햇볕이 따갑기도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다소 썰렁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좋은 계절에 집에서만 있다는 것은 70이 저만치 와 있는 나이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한 그냥 보내기엔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갔다가 왔다고 하는 마누라를 보채서 전남 영광에 불갑사의 상사화를 보러갔다. 우리 내외가 간다고 하니 동네 아줌마 두 분이 따라 나섰다. 이번에는 불갑사에 가서 상사화를 보고 온 얘기를 해볼까 한다.
여행 가기 전날 밤은 천둥번개가 치고 가을비 치고는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비가 쏟아졌다. 아파트 옆으로 나있는 경사로 위로 도랑처럼 콸콸 소리 내어 빗물이 흘러 내렸다. 내일 모처럼 날짜 잡아 여행 가는데 마치 훼방을 놓는 듯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새벽에 집을 나서서 하늘을 보니 구름 사이로 간간히 별이 보이고, 코 끝에 다가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집을 나서거나 어디를 여행할 때 날씨가 좋은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이라는 말을 여러 사람들을 통하여 들었다. 오늘도 날씨가 우리를 도와주었다.
잠실 롯데백화점 앞에 도착하니 꽤 이른 시간인데도 여기저기 온통 관광버스와 아줌마들로 붐비고 북적였다. 깃발을 든 한 남자가 “올에이, 올에이!”하고 외쳤다. 그걸 보고 ‘영광 불갑사’하고 대꾸를 했더니 성함을 확인하고 나서야 버스가 도착하려면 20여 분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지하철역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어정쩡해서 ‘너구리’ 동상 주위를 맴돌았다. 새벽시간에 참, 대단한 풍경을 보았다. 아직 행락철도 아닌데 웬 아줌마들이 잠실인도를 뒤덮고 있단 말인가. 놀라운 사실을 잠실에 와서 발견했다.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여자, 특히 아줌마들이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하는 얘기를 중국 장가계 갔을 때와 베트남 하롱베이 가서 아줌마들을 통하여 직접 들었다. 이걸 보면 조선시대, 구한말을 거쳐 여기까지 오면서 그 때에 비해 한국사회가 많이 변화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버스에 승차하니 자리가 뒤쪽으로 몇 석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남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올에이여행사’를 통하여 하는 여행이 지난 8월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번에는 남도(南島)여행이었는 반면에 이번에는 내륙지방이면서도 서쪽해안 쪽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수도권을 빠져나갈 때만해도 길이 밀려 질질거리고 가더니 수원·기흥을 지나서는 제 속도를 다 낼 수가 있었다. 산은 푸른데 들판은 온통 누렇게 변했다. 남쪽으로 내려가니 가끔씩 벼를 베어낸 논바닥이 보이기도 하고, 나지막한 산에는 입을 딱 벌린 밤송이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렇게 4시간 가까이 달려 전북 고창을 거쳐 전남 영광의 상사화(꽃무릇)로 이름난 불갑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불갑사 들어가는 신작로엔 관광 온 사람들로 붐비고 넘쳐서 도로 반을 막아 차량통행을 막고 사람들이 통행하게 영광군에서 배려를 했다. 우리가 걷는 길 양쪽으로 붉은 상사화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가로수 밑으로 빨간 상사화가 가로화인 데는 없다. 그 길을 15분 걸어 올라가면 불갑사 정문이 나온다. 정문을 지나고부터는 양쪽으로 군락을 이룬 상사화의 향연이 펼쳐진다. 곳곳이 붉게 핀 상사화로 뒤덮여 있다. 바보, 철부지, 젖먹이들도 여기 와서 저 꽃을 보고서 도저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2년 전 돌도 안 된 나의 큰 손자를 데리고 군포 양지공원에 철쭉꽃을 보러갔더니 말을 못하는 손자가 꽃을 만지려고 손을 내밀고 발을 동동 굴러대는 모습을 보고 자연의 힘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영광에 있는 불갑사에 와서 상사화를 보고 또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절까지 올라가다보면 잉카문명의 발상지인 남미 친구들의 공연모습도 볼 수가 있고, 스님가수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영어와 우리말로 번갈아 부른다. 시주함에 시주를 넉넉히 하면 같이 사진까지 촬영할 수 있는 영광을 준다. 이런저런 구경을 하면서 올라가면 어느새 불갑사 경내에 도착하게 된다. 불갑사 절은 크지 않아서인지 아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사화의 대명사가 된 불갑사! 불갑사의 상사화에 얽힌 얘기를 해보자. “옛날 어느 산속 절에 열심히 도를 닦던 젊은 스님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불공을 드리러 왔던 어여쁜 처녀가 불공을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차에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가지 못하고 잠시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젊은 스님이 처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여 연모하는 마음이 불같이 타 올랐으나 스님은 도를 닦는 입장이라 차마 말도 못하고 상사병에 걸려 밤잠을 설치면서 시름시름 앓다가 빼빼하게 말라서 그만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 노스님이 이를 보고 불쌍하게 여겨 절 옆에 고이 묻어 주었는데 그 무덤에서 풀이 자라더니 초가을 추석 무렵에 긴 줄기 위에 붉은 꽃이 피었다. 이걸 보고 사람들은 젊은 스님의 넋이 꽃이 되었다고 하여 상사화라고 불렀다고 한다.”전남 영광에 와서 참으로 대단한 꽃의 향연을 보았다.
점심을 먹기 전 영광의 막걸리로 목을 축이니 취기가 금방 온몸에 퍼졌다. 평일인데도 어디를 가나 사람들로 넘쳐서 식당에 와서도 손님대접 받기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밖에서 기다렸다가 자리가 나면 얼른 들어가서 빨리 나오는 공통된 요리를 시켜야 그나마 시간을 단축한다. 우리는 밥이 나오기 전에 파전하고 막걸리가 들어와야 했는데 거꾸로 나오는 바람에 먹는 즐거움을 느끼기에 부족했다. 지난번에 ‘올에이’와 함께한 여행은 눈과 입, 그리고 마음까지 감동시키는 특별한 여행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주로 보고 느끼는 것에 초점을 맞춘 맞춤형 여행이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서쪽으로 이동했다. 버스 차창가로 보이는 풍력발전기가 나지막한 산 위에 여기저기 눈에 들어왔다. 대관령보다 풍력발전기가 더 많은 서해안에 들러서 한숨을 돌리고 나서 고창의 ‘백수해안로’를 따라 여행은 계속되었다. 바닷가로 나있는 데크길을 따라 1km 남짓 걸었다. 햇볕 따라 물색깔이 변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십 수 년 전에 이 길을 드라이브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그런대로 아름다웠는데 지금은 바닷가로 지자체에서 길을 닦아 놓으니 더 걷기가 좋았다. 왼쪽으로는 바다가 있고 우측 산 쪽으로는 밤이 벌어져 어서 오라고 불러댄다.
그 길을 걷고 나서 영광대교 옆 백제 불교 도래지인 마라난타사로 이동했다. 석양에 바다와 대교가 어우러져 한창 빛을 뽐내고 있다. 데크길을 따라 7-8분 걸어 올라가니 높은 산쪽으로 공사를 하는 절이 보이고, 그 밑으로도 무슨 건물인지는 몰라도 아기자기한 건물이 눈에 확 들어왔다. 참으로 기이하고 아늑한 분위기인 마라난타이다.
우리 일행은 다시 길을 재촉하여 고창의 80만평의 메밀꽃 밭으로 이동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봉평의 이효석 기념관이 있는 메밀꽃이 한창이었다. 요즘에는 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메밀꽃 밭을 모두 갈아엎고서 채소를 심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고창의 메밀꽃 밭을 잘 갔다 온 것 같다. 지난 8월 초에 ‘올에이여행사’를 통하여 갔을 때는 맛과 눈요기뿐만 아니고, 느낌으로 한 여행이었다면 이번은 눈으로 본 여행이었다. 그런데도 집에서 출발할 때 동네 아줌마 두 분과 같이 갔다고 했는데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방울토마토, 고구마, 비스켓 등 많은 것을 싸가지고 와서 입을 그래도 즐겁게 해줬다. 여행은 눈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만, 또한 먹는 것을 빼놓고는 훌륭한 여행이 될 수 없다.
이번에도 불현듯 집을 나서서 영광에 불갑사의 상사화를 보고 왔고, 백수해안로를 따라 걸으면서 돌아가는 풍차도 보고, 고창에 메밀꽃도 봤다. 정말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너무도 융성한 대접을 올에이여행사를 통하여 받았다. 올에이 사장님의 사모님께서 김치도 직접 담았고, 반찬도 손수 마련한 것으로 맛있게 아침을 잘 먹었다. 사장 사모님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가이드 박 선생께도 많이 수고하셨다는 말을 남긴다.
올에이를 통하여 아주 아름다운 여행을 했다. 이 말은 괜한 칭찬이 아니라 버스를 타고 같이 갔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한 말이다. 늘 한결같이 고객을 대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회사를 두 배, 세 배 키울 것으로 본다.
오늘도 안양 시내에서 가족 너댓 명이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를 아주 여러 잔하고 이글을 썼다. 아름다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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