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세차게 분다. 겸사겸사 하는 여행이라서 날씨가 좋았으면 했는데 비만 내리지 않았을 뿐이지 여행하는 내내 모자를 쓰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바람은 심하게 불어댔다.
첫날은 경주에서 가장 볼거리가 많고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보문단지 초입이고, 화조원이 지척에 있어 숙소에서 걸어서도 가볼 수 있는 조용하고 아늑한 경주별빛여정에 여장을 풀었다. 이 별빛여정펜션은 지은 지가 얼마 안 되어 건물자체가 깨끗하면서도 한옥으로 지어져 여느 펜션에서 느낄 수 없는 고풍스러운 멋과 편안함을 다 같이 맛볼 수가 있다. 게다가 5분 거리에 있는 보문호탐방로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더라도 저녁시간이나 아침시간을 이용해서 걸어보면 참으로 훌륭한 명품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특히 어둠이 찾아온 후 솔밭 길을 걸어보면 길바닥에 온갖 모양의 무늬가 길을 밝혀주고 있고, 보문호 둑방길에는 크고 작은 조명등이 어둠 속에서 찬란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하게 불빛을 밝혀 둑방길을 찾는 길벗을 맞이한다. 호수 제방에 설치한 작은 조명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소를 머금은 여인의 얼굴이 조명등에 비쳐지는 데 이것을 ‘신라인의 미소’라고 부른다. 더구나 펜션 바로 옆에는 입맛에 맞춰 식사를 할 수 있는 여러 식당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식사거리를 장만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경주시 북군동의 펜션단지 입구에 있는 ‘별빛여정펜션’은 펜션시설, 주변의 교통여건 및 편의시설 등을 고려해 볼 때 경주시내에서 이만한 펜션도 찾기가 쉽지 않다. 가서 하룻밤을 자보면 짙은 아쉬움이 남아서 하루, 이틀을 더 자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경주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부산으로 길을 떠났다. 경주에서 부산은 바로 밑인데도 시간은 꽤 걸렸다. 울산을 지나 부산으로 가면서 기장군에 있는 해동용궁사에 들렀다. 절은 크지 않지만 바닷가 쪽으로 붙어 있어서 운치가 있었고, 특히 절 뒤쪽으로 바위에 쌓아 놓은 돌탑은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이 용궁사의 상징물이었다. 그 전날 바람이 많이 불어 바닷물이 뒤집혀 육지와 가까운 곳은 흙탕물이 된 것이 보기가 안 좋았지만, 부산에서 가까워서 그런지 많은 관람객이 몰려들어 걷기가 어려울 정도의 인파로 북적였다.
부산 해운대로 이동을 했다. 해운대에 있는 한화리조트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보니 해운대가 옛날의 해운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물들은 모두 고층건물이고, 지은 지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새로운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딴 나라라도 온 듯 착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변모였다. 울산 처남내외와 우리 일행과 같이 합류하여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해운대 백사장을 같이 걸었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이 해안가 백사장에 앉아 얘기도 하고, 또 삼삼오오 걷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백사장을 걸어 동백섬으로 가다 보면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이 나온다. 36년 전에 이리로 신혼여행을 온 기억이 새롭다. 세월이 언제 그렇게 갔는지 큰아들, 작은아들 다 결혼시키고 손자까지 보고 마누라와 같이 이 길을 걸어본다. 동백섬 해안로를 따라 둘레길을 걸어 널찍한 도로로 올라서니 주변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운동을 하는지 걷는 사람들로 신작로가 붐볐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APEC 정상들이 모여서 정상회담을 했던 누리마루가 나오고, 좀 더 내려가면 산책길이 끝이 난다. 낮에 걸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비록 밤이기는 해도 그래도 좋은 길을 걸었다.
부산에 와서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오늘은 아침을 먹고 나서 이기대 갈맷길을 걸으러 갔다. 이기대(二妓臺)는 임진왜란 때 적군이 수영성을 함락시킨 후 경치 좋은 이곳에서 잔치를 하는데 적장에게 술을 많이 먹게 하여 두 기생이 적장을 안고 물에 빠져 죽었다는 데서 유래가 전하여 오지만, 두 기생의 무덤만 있을 뿐 뒷받침해 줄 정확한 사료는 없는 편이다. 이기대에는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770km로 이어지는 해파랑길의 1구간이 시작되기도 한다. 우리는 갈맷길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주차장⇒동생말⇒구름다리⇒이기대⇒해녀막사⇒솔바람쉼터⇒주차장”으로 오는 코스를 택했다. 남해로 이어지는 바다절경을 보며 데크로 만든 길도 걷고, 흙길과 자갈로 된 갈맷길을 번갈아 걸었다. 해녀막사에 오니 해녀 두 사람이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멍게, 해삼, 소라 등을 좌판에 놓고 팔았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해삼 몇 마리를 잡아 요기를 했다. 이 길을 따라 쭉 한 시간 정도 걷는 다면 오륙도 해맞이 공원이 나오지만, 우측으로 나있는 사잇길로 빠져 산쪽으로 올라가서 차가 다니는 포장로를 따라 5분 남짓 걸으면 처음 출발했던 주차장이 나온다.
1977년도에 부산에 와서 태종대에서 배를 타고 오륙도를 돌아 나올 때 선장이 직접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을 불러주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38년이나 지나 젊은 날 여기에 왔던 추억에 잠겨본다. 점심약속이 없었다면 계속 걸어서 십수년 전에 배를 타고 돌아보던 오륙도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직장을 떠난 지가 벌써 만 6년이 되는데도 부산에 왔다고 하니 후배들이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해서 자갈치시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자갈치 시장은 전에 생각하던 복잡하고 허름한 좌판시장이 아니라 현대식 건물로 번듯하게 잘 지어 놓았다. 아주 한참 만에 전 직장 친구들을 만나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옛날로 금세 돌아가 같이 고생하던 얘기를 해보았다. 이렇게 세월이 갔는데도 잊지 않고 불러주는 후배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가.
점심을 먹은 후에는 자갈치 구시장을 한 번 돌아보고, 지난 해 선풍을 일으켰던 영화 ‘국제시장’의 촬영지였던 시장 여기저기를 구경하면서 ‘꽃분이네’ 집도 슬쩍 넘겨다보았다. 참으로 사람도 많고, 가게도 많았다. 시장을 빠져나와 중학교 수학여행을 와서 가 보았던 용두산 공원을 만 50년 만에 가 보았다. 여기 부산에 업무로 출장을 숱하게 내려왔는데도 오늘처럼 용두산 공원을 가볼 여유는 없었다. 왔다가 그냥 가고를 반복했는데 오늘은 큰마음 먹고 가보니 옛날에 왔을 때 비둘기들만 여기저기 많았다는 기억밖에 없는데 관광버스들이 즐비하게 서 있고, 부산 시내를 관망할 수 있는 조망탑을 타는 엘레베이트에는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전망대를 올라가서 부산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부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주 멀리까지 한눈에 볼 수가 있었다.
용두산 공원을 갔다 와서는 동생내외를 만나러 전철을 타고 김해로 이동했다. 부산에서 김해가 바로 옆인지 알았는데 전철을 타고 가다가 사상에서 경전철로 바꿔 타고도 한참을 갔다. 이 동생은 내 막내 동생인데 오래전부터 부산에 내려와 살고 있었지만, 20년 전 전포동에 살 때 와 보고 이번이 두 번째로 찾아본다. 제수씨가 몸이 많이 안 좋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원생활을 하다가 퇴원하여 집에서 요양하고 있지만 많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오늘은 콘도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든든히 먹었다. 부산에서의 마지막 날이라서 콘도를 나갈 때 배낭을 챙겨 메고 나갔다.1977년도에 가보았던 태종대를 시내버스를 타고 갔다. 태종대에 도착하니 평일인데도 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정신이 없다. 더구나 기온이 바닷물과 차이가 나서 해무가 잔뜩 끼어 배는 출항을 못하고 다누비 열차를 타려고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탄력적으로 열차를 움직인다고 해도 한참을 기다렸다. 다누비 열차는 산속 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여서 군데군데 몇 정거장을 거쳐 전망대에 도착했다. 원래 해무가 없었다면 아름다운 태종대의 모습을 멀리까지 볼 수가 있었는데 바다 쪽으로는 200m 거리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니 답답한 마음이 들 정도로 해무가 짙다. 등대가 있는 길을 따라 해안 쪽으로 걸을 때는 잠시 나아지는 듯 했지만 이내 앞이 안 보이고 깜깜해졌다. 그 나마 간간히 걷히는 안개 틈으로 보이는 등대 우측으로 해안 절벽이 보기가 좋았다. 등대에서 다시 올라와 순환 다누비열차를 타고 처음에 타고 출발했던 태종대 승차장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다시 부평 깡통시장을 가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깡통시장이 다른 건 몰라도 어묵은 유명하다고 해서 갔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묵을 사서 가져가는 것은 되지만 실제로 우리처럼 여기서 먹고 가려니 먹을 데가 없었다. 그래서 어묵시장에서 우측으로 돌아 나오니 분식과 스넥집이 몇 집 있었는데 한 집에 들러 국수를 시켜놓고 사간 어묵을 꺼내 먹었다.
이렇게 3박 4일의 여행을 마치고 택시를 타고 부산역으로 이동을 했다. 부산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을 왔는데도 볼일만 보고 바로 올라가기가 바빴지, 이번처럼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실속 있는 여행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부산의 명승지도 둘러보고, 동생내외의 근황도 보았는가 하면 예정에 없던 직장동료들도 만나봤으니 어떻게 보면 이번 부산여행은 다목적 여행이었다. 내 평생 다녀본 여행 가운데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훌륭한 여행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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