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양동의 눈덮인 산길을 걷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11. 2. 4. 23:43

 

 

추운 날씨라고 해서 미리 두툼한 옷가지를 몇 개 더 챙겼다. 그리고 여느 때와는 달리 아침식사도 따뜻한 걸로 먹고 집을 나섰다. 전철을 타니 일요일 이른 아침 시간인데도 어디를 가는지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늘 그랬듯이 집을 떠나 여행을 한다고 하면 이렇게 나이가 들었어도 떠나기 전날 밤은 잠을 설치기가 일쑤다. 그래서 전철을 타고 가면서 잠시 눈을 붙여 보기로 했다.

 

청량리서 기차로 바꿔 탔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하여 빌딩과 아파트 숲을 힘차게 내달렸다. 옛날 같으면 기적이라도 울리고 출발해서 달렸을 것 같은데 도심을 다 빠져나가도록 기적소리는 듣지 못했다. 도심을 벗어난 기차는 얼마 안가 강과 산을 지나고 있다. 차창 밖으로 산과 들에는 언제 눈이 왔는지 히끗히끗 덮인 눈이 보인다.

 

 나는 두어 달 전부터 도보여행을 할 때 버스를 타든 기차를 타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떠나가서 걷는 여행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하니까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일반적인 여행에서 오는 즐거움과 걷는 즐거움을 다 같이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청량리에서 무궁화를 타고 덕소, 양평, 용문을 지나 매곡을 가고 있다.

 

매곡역은 역무원이 한 사람도 없지만, 무궁화호가 하루에 몇 번씩 정차를 하여 우리 같은 사람과 주민들을 내려주기도 하고, 태우기도 한다. 매곡역에 우리 일행이 내리니 그 조용했던 시골역이 금방 시끌벅적하다. 9 넘은 시간인데도 기온은 영하 6-7도로 떨어져 가만히 있으면 금방 한기를 느낄 정도로 춥다.

 

 역을 빠져 나와 마을 입구에 다다르니 동네에 있는 개들이 다 짖어대며 우리를 맞이했다. 마을을 지나쳐 산길로 접어드니 생각보다 눈이 많이 쌓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걷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고, 걷기에 편안한 감을 줄 정도로 알맞게 쌓였다. 추운 날씨도 우리에게 더 이상은 장애가 되지 않았다. 걷기 시작해 30분 정도 되니 이마엔 땀방울이 맺히고, 등줄기는 땀으로 촉촉하다. 이렇게 고래산 임도를 기분 좋게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걷지 않은 하얀 길, 간간이 노루, 고라니, 토끼만이 우리 앞에 걸었던 새하얀 눈길을 우리는 그들 보다 조금 늦게 걷고 있는 것이다.

 

 매월리에서 시작해서 눈이 쌓인 산길을 세 시간 가까이를 걸어서 매곡과 양동역 중간 지역인 석곡리까지 왔다. 우리는 석곡에서 금왕산으로 올라가는 임도 초입에서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마을이 가까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날씨는 춥지만 밥맛은 추운 것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지 집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다시 우리는 길을 재촉했다. 오른쪽으로는 그리 크지 않은 개울이 있고, 개울 따라 난 길에는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다. 누가 눈을 치웠는지 길가에 밀어낸 눈이 군데군데 쌓여 있고, 눈을 치운 흔적이 역력하다. 오르막길이어서 통행에 불편을 줄 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치운듯싶다. 시멘트 포장 길은 끝나고, 오르막에 흰 눈이 덮인 산길로 이어졌다. 산 능선이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그 많고 울창하던 숲은 다 어디로 가고 총총히 서있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공간이 훤하게 보인다. 이렇게 겨울은 나무들을 발가벗겨 세워놓고 비와 눈을 다 맞으라고 한다. 그래야 내년 봄에 건강한 잎새와 열매를 기약한다며 그 고통을 다 감내하라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서있는 사잇길, 그것도 하얗게 눈이 덮여 때묻지 않고 깨끗한 순백색의 길, 발짝을 떼어놓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며 뚜렷한 발자국을 남겨서 우리가 왔다간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그런 길을 오전부터 오후까지 걷고 있다. 오전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오후가 되니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평생을 걸었던 눈길보다 오늘 하루 걸은 눈길이 더 많이 걸었지 않았을까 싶다.

 

 오후에 걷는 금왕산 임도는 고래산 임도보다 더 많은 눈으로 덮여 있고, 오르막 또한 길게 이어졌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걷는 것이 다소 힘들다고 느껴질 때쯤 오르막은 끝나가고 있었다. 세시간 가까이 걸은 것이다. 내리막은 평소 보다 훨씬 빨리 걸었다. 눈길이어서 조심하면서도 속도를 내야 했다. 겨울 산은 해가 금방 넘어가 오후 5만 돼도 어둠이 내린다. 반은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했다. 그 덕분에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해서 평지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길에 눈이 녹았다가 살짝 얼어서 얼마나 미끄러운지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버스가 다니는 큰 길이 나왔다. 이미 해는 서산에 지고 가로등이 없는 시골 길은 어둠이 깔리었다. 그 길 따라 한 시간을 부지런히 걸어서 양동역에 도착하니 곧 기차가 왔다. 기차는 만원이어서 어느 칸을 가도 빈 자리는 없다. 객실과 객실사이 공간에 종이를 깔고 앉으려고 하니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이 히프를 돌려주지 않는다. 일행을 만나 공간을 할애 받아 차 바닥에 앉았다. 오랜만에 차 바닥에 앉아서 느껴보는 행복이다. 여행 아니면 어디서 이런 행복을 느껴 볼 수 있을까?

 

겨울인데도 오늘은 하루 해가 길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 기차를 타고 양동 오지 산속에 가서 눈이 수복이 쌓인 산길을 하루 종일 걸었으니 어찌 긴 하루라고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눈 덮인 산길, 내가 걷고 싶다고 해도 날씨()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여연님의 길 안내가 없었다면 더더욱 불가능 했을 것이다. 추억을 담고 행복한 길 걷게 해주신 여연님께 감사 드리고, 같이 걸어준 행()님들께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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