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한다고 하면 마음이 들뜨고, 가슴이 설레이는 것은 나이가 먹어도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나만 그런 걸까? 아닐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나와 같은 생각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러다 보니 떠나기 전날은 잠을 설쳤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 남해바래길로 도보여행을 떠나보자. 버스를 타고서 못 잔 잠을 청했다. 2-30분씩 토막 잠을 자지만 자고 나면 그래도 개운하다. 이렇게 몇 번을 자다 보니 어느새 남해 당항마을에 도착했다. 거기서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버스에 올라 20분 남짓 이동해 도착한 곳이 적량해비치 마을이다. 수도권에서 내려간 대형 버스 두 대와 영남지역에서 중형버스로 이동해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로 좁은 바닷가 어촌마을 길은 순식간에 북적거린다. 바로 우리 일행은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나지막한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넓은 바다로는 크고 작은 섬들이 보이고, 좁은 바다에는 마을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걷는 길에는 온통 고사리 밭이다. 군데군데 나무를 베어내서 고사리를 심었다. 하지만, 그 고사리가 늦은 봄이나 여름에는 싱싱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겠지만 계절이 겨울이다 보니 고개를 숙이거나 힘없이 자빠져 있는 모습이 안타까울뿐더러 꺾어진 우리 인생 같아서 쓸쓸하기까지 하다. 원래대로 소나무든, 대나무든 푸른 나무가 있던지 아니면 그냥 아무 나무가 됐든 고사리 대신 그 자리에 나무가 있는 것이 보기가 좋았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걸었는가 싶더니 천포마을이 나오고 마을을 지나 해안가를 따라 얼마를 더 걸으니 가인의 공룡 발자국이 나왔다. 공룡 발자국은 바위에 찍힌 모습이 마치 처녀엉덩이로 살짝 눌러 놓은 거처럼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모습으로 여기저기 보였다.
우리는 고사리가 뒤덮은 가파른 언덕 길을 올라가다가 산 중간 고사리 밭 한가운데서 휴식을 취하다가 선두는 막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고, 나는 후미를 따라 걸으려고 할 때 마을 사람을 만났다. 바쁜데 그 양반은 무슨 얘기든 나누고 싶어 했다. 얘기 끝에 ‘남해바래길’ 얘기가 나왔는데 여기서의 바래길은 이 마을과 저 마을 사이 오가는 사람을 마중도 나가고 바래다 주기도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장구하게 설명을 한다. 충청도에서도 어디를 데려다 주는 걸 바래다준다고 한다. 얘기를 더하고 싶어하는 마을 사람을 억지로 떼어놓고, 고사리 길을 가뿐 숨을 몰아 쉬며 부지런히 걸어 산 능선에 올라가니 동글동글한 작고 예쁜 작은 산들이 바다에 떠 있는 듯이 보인다. 멀리 오른 쪽으로 삼천포화력발전소인지 희뿌연 연기를 내뿜는 굴뚝이 보이고, 중앙엔 사천대교가, 왼쪽으로 그리 멀지 않게는 남해의 명물 남해대교가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남해의 경치를 내려다본 후, 식포를 지나 산길과 해안 길을 따라 5-6km를 더 걸으니 창선 방조제가 나왔다. 오른쪽으로 물이 빠진 갯벌에는 왜가리와 철새들이 먹이 찾는 데 한창이고, 왼쪽으로는 수 백 미터의 갈대밭이 장관이다. 언제 해가 넘어 갔는지 금방 어둠이 깔리고, 해 떨어진 바다 바람은 차가웠다. 아무리 남쪽이라고 해도 겨울은 겨울인가 보다.
이렇게 우리는 첫날 14km의 인도행을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이튿날 아침이다. 우리 나라 육지에서는 남쪽 가장 끝인데도 아침의 기온은 춥게만 느껴졌다. 아침을 따뜻한 콩나물 국으로 식사를 한 후 남면 석교리의 청소년 수련장을 출발했다. 여기가 청소년 수련장이 되기 전에는 초등학교였던 것이 학생이 줄면서 폐교를 하고 수련장으로 개조를 해서 남해의 청소년뿐만 아니라 전국에 청소년들을 불러들여 단체생활을 통해 사회생활을 배우게 하고, 호연지기의 꿈을 키우는 곳으로 탈바꿈한 것으로 본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비록 하룻밤이긴 하지만 전혀 불편함이 없이 따뜻한 방에서 자고, 맛있고 정결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어제 밤에 들어올 때는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는데 마당에는 잔디가 깔린 축구장이 있어서 여느 수련장에서 보지 못한 훌륭한 시설에 놀랐다. 대문 앞에는 신랑, 각시 장승이 나란히 서서 우리를 배웅한다. 참으로 융성한 대접을 받고, 흐뭇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우리가 어제 걸었던 창선면 쪽에는 고사리 밭이 주로 많았던 반면에 오늘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보니 남면 쪽에는 진초록의 마늘 밭이 어디를 가든지 쉽게 볼 수가 있었다. 물론 특산물로서 개개의 특성은 있지만, 이 한 겨울에도 푸르름을 유지하는 것과 생을 다해 누렇게 변해 버린 고사리가 참으로 대조적이다. 차창 밖으로 이어지는 들과 산, 섬과 바다를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평산 항에 도착했다. 평산 항 가장 널찍한 곳을 찾아 걷기전에 준비운동을 한 후, 카폐 이틀 째 정기 도보를 시작했다.
해안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산으로 올라가는 황토 흙 길이 나오고, 그 옆으로 보리 밭이 아래에는 진초록의 돌산갓과 시금치가 한 겨울임에도 자랑스럽게 멋을 부리고 있다. 여기서 바다를 내려다 보니 참으로 많은 섬들이 눈에 들어오고, 육지 쪽으로는 크고 작은 도시가, 눈을 돌려 옆을 보면 몇 채 안 되는 어촌 마을이 보인다. 이렇게 사람 사는 진귀한 풍경을 한 눈으로 한꺼번에 본다는 것이 하늘에서 내려준 좋은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길바닥엔 뉴턴 표시로 돌아서 나가라고 한다. 우리는 다시 온 길을 돌아 나와 좌측으로 길 머리를 돌리니 급경사의 붉은 황토길이 이어졌다. 황토 길은 오래지 않아 끝나고, 오르막의 수풀길이 나왔다. 수풀 속에는 소나무가 많았지만, 간간이 굵은 진달래 나무가 있었다. 여기가 남해바래길에서 유명하다는 유구의 진달래 길이다. 봄에 이 길을 걷는다면은 탐스러운 진달래 꽃과 향기에 취해 정신이 없을 것 같다. 다만, 길 닦은 지가 얼마 안되어 다져지질 않아서 흙먼지가 올라가는 내내 우리를 괴롭혔지만, 그런대로 걷는 데는 큰 지장을 주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서 길을 다져야 할 것 같다. 어제 오늘 걷는 길 중에서는 가장 수풀이 우거진 산길이었다.
진달래 산 길이 끝나니 바다와 붙은 길이 나왔다. 4-500m의 방파제 사이로 빠져가는 길이 나오고, 거길 지나니 조약돌로 뒤덮인 바닷길을 걸어야 한다. 조약돌 길은 5-600m 되는데 걷는 내내 미끄러워서 술 취하지도 않았는데도 술 취한 취객처럼 비틀거리며 걸어야 했다. 그곳을 지나니 사촌해수욕장이 나왔다. 해수욕장 뚝방 길에는 작은 조약돌로 발맛사지 길이 있고, 오른 쪽 해변으로는 고운 모래의 백 사장이 이어졌다. 사촌 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길지 않은 언덕 길을 올라서 선구보건소라는 간판을 보고 우측으로 내려가니 선구몽돌해변이 나왔다. 우리는 거기서 식당에서 배달 나온 음식으로 조약돌로 덮어진 해변을 방석 삼아 삼삼오오 둘러 앉아 점심 식사를 했다.
해변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항촌몽돌해변을 지나 항촌 전망대에 오르니 남해 바다가 아주 멀리까지 시원하게 보였다. 거기서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눈앞에는 여수 돌산대교가 있고, 길게 남쪽으로 돌산도가 이어진다. 그 뒤쪽으로는 고흥반도로 보이는 커다란 산이 겹쳐져 있다. 이렇게 우리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남해의 모든걸 보고 있다.
다시 우리는 차가 다니는 길을 따라 바다를 보며 또 걸었다. 썰렁함을 느낄 때는 빨리 걷고, 조금 땀이 나려고 하면 속도를 줄이며 한 시간 가까이를 걸으니 오른 쪽으로 ‘가천마을’ 이라는 커다란 입석이 나오고, 10여 분 후 다랭이마을이 나왔다. 다랭이 마을은 층층 계단으로 된 땅에다 집도 짓고, 농사를 지며 대대손손 살아간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마을 한 복판으로 들어가니 마을의 상징인 ‘암수바위’가 탁 버티고 있다. 숫바위는 여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실하고 큼직했다. 그 옆에 갈라진 바위가 있어서 그 바위가 암바위인 줄 알았는데 안내판을 보니 숫바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길죽하고 배가 부른 바위가 아이를 밴 암바위라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며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다산을 염원했을 것이고, 어려운 환경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손도손 살아가는 걸 보면은 암수바위가 그 마을을 지켜준 덕분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여기서 우리는 2일차 도보 16km를 마쳤다.
남들이 집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남해로 여행을 와서 아름다운 바다경치를 보고 거기다가 도보까지 하며 심신을 단련했다고 생각해 보자 어찌 즐거움이 배가 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며칠 째 고생해 주신 주관자 여려분께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하고, 같이 걸어준 친구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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