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이른 아침이다. 안양에서 강남터미널까지 얼마를 걸리는지 종 잡을 수가 없어서 좀 일찍 나왔다. 평소 같으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으로 봤는데 토요일인데다가 이른 아침이다 보니 30분이 채 안 걸렸다. 강남터미널에 내려서 킴스아울렛까지는 걸어서 5분이면 충분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일찍 나와서 4-50분을 기다려야 했다. 버스는 한참이 지나서 왔다.
버스는 정시에 출발했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많은 차들로 붐빈다. 서울을 벗어나고 수원, 기흥까지도 차는 시원하게 달리지를 못했다. 오산을 가서야 속도를 내는 듯 했다. 마음나그네님이 따뜻하고 김이 나는 팥고물시루떡을 나누어 줬다. 한 입 물어보니 팥 향기가 입안 가득히 퍼진다. 맛 또한 있었다. 아침 요기로 충분했다. 차창 밖을 내다 보니 가을걷이가 끝나고 들에는 타작을 마친 볏짚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겨울철 소 먹이를 위해 비닐로 볏짚을 묶어 놓은 크고 둥근 볏 짚단들도 눈에 띄었다. 지난 9월 말 지리산 둘레길을 갈 때만해도 누런 황금들판이 풍요로움으로 마음까지 넉넉하게 하더니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이렇게 황망함과 쓸쓸함만이 내 눈에 들어오다니 세월의 속도를 다시 한번 느낀다.
버스는 서울을 출발한지 4시간이 넘어서 무등산 옛길입구에 도착했다. 우선 무등산옛길을 가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무등산은 1,187m이고, 광주의 진산이라고도 하며 후덕한 어머니의 산이라고도 한다. 인구 100만의 도시에서 10km이내에 1,000m가 넘는 높은 산은 그리 흔하지 않다. 무등산옛길은 옛날에 우리 선조들이 걷던 길을 도시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포장해서 편리한 길을 만들어 다녔다가 이 길을 다시 옛날 길로 복원하여 선조님들의 삶의 지혜와 얼을 돌아보고,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2009년 5월에 신수동5거리에서 충장사를 거쳐 원효사까지 7.75km 1구간을 개통하였고, 2구간인 원효사에서 제철유적지를 걸쳐 서석대까지 4.12km 구간은 동년 10월에 개통되어 총 연장길이가 11.87km가 되었다. 이 거리는 무등산의 높이 1,187m와 같다.
우리는 무등산옛길을 마을 끝자락부터 걷기 시작하여 얼마를 걸으니 마을이 끝나고 바로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나왔다.경사가 있는 오르막에다가 걷는 것이 빨랐는지 숨이 차오르고, 장딴지가 당긴다. 고개를 올라서니 평평한 길이 나와서 한숨 돌렸다. 가는 길마다 다 이름이 있었다. 소나무가 많아선지 소나무길도 있고, 황소처럼 천천히(광주사투리:싸목싸목) 평화롭게 걸으라는 황소길, 이 길로 소금장수들이 많이 다녔는지 소금장수길도 있었다. 그렇게 오르막내리막을 하며 3-40분을 걸으니 저수지가 나왔다. 저수지를 건너는 다리가 청암교인데 여기에도 길이름이 있다. ‘연인의 길’이고,’약속의 길’이다. 연인과 같이 여길 와서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변치 말자는 사랑을 약속하는 길이다.
그 다리에서 우측으로 산을 올려다 보니 거기에만 아직 단풍이 곱게 남아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니 그리 크지 않은 공원이 나왔다. 청풍쉼터다.청품쉼터에는 김삿갓 시비와 비석이 있고, 그 풍랑시인이 여기 사람이라는 걸 이렇게 증명해주고 있었다. 주위엔 여기저기 벤치가 있고, 우리는 잠시 거기서 쉬었다.
밥 먹는 시간은 많이 주지 않았다.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우리는 또 걸었다. 밥을 금방 먹고 오르막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고역이다 못해 고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점심을 덜 먹을걸 후회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김삿갓선생께서 화순, 적벽가는 길에 걸었던 유서 깊은 길이다. 얼마를 더 걸으니 옛날에 나무꾼들이 나무하러 가던 나무꾼 길이 나왔다. 지금은 이렇게 울창한 수풀로 우거졌지만 오래 전이긴 해도 나무꾼들이 나무를 해다가 밥도 해먹고, 난방도 하고 그럴 때는 산에 나무가 별로 없는 벌거숭이 산이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산이 많이 우거져 있는데 몇 년 전에 개성과 금강산을 가서 보니 북한에는 아직도 벌거숭이 산이 많다. 계속 산길을 걸었다.
산길에는 어느 길이든 참나무와 갈참나무 낙엽으로 덮여 있다.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가서 밟을 때 소리가 요란하진 않다. 그냥 조금 나는 듯하다 만다. 차가 다니는 아스팔트 포장 길은 우리가 걷는 데서 적게는 50m부터 멀게는 100여m내 우측에 있다가 또 한참을 가다 보면 좌측에 있기도 하며 우리가 걷는 옛길과 괘를 같이 한다. 이걸 보고 ‘길 위에 길이 있다.’라는 말을 하는가 보다. 또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길이 나왔다. 화암길, 주막이 나오고 장보러 가는 길이 나왔다. 이 주막에서는 옛날에 화순, 담양에서 광주로 소 팔고 오던 사람, 장보고 오던 사람뿐만 아니고 김삿갓선생도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였을 것으로 상상해 본다. 특히 광주 양동이나 대인 시장에서 소 팔고 오던 선조들은 몇 잔 더해 거나하게 취해 그 길을 걸었을 것 같다. 숲 속의 길에 접어드니 소나무들이 많았다.
무등산에는 참나무, 갈참나무가 주종이고, 80% 이상인데 소나무군락지가 있었다. 키가 크고 꼿꼿한 리끼다소나무가 나오고, 거기서 크고 작은 바위와 큰 돌멩이로 된 길을 지나니 굵은 적송 군락지가 나왔다. 그 밑에 길에는 솔잎이 떨어져 있어 우리가 걷는 걸 편안하게 해줬다. 거기서 조금 더 걸으니 관망지역인 ‘원효봉너덜겅길’이 나오고, 계속 숲 속길은 이어졌다. 20여분을 더 걸으니 어사바위가 나오고, 오르막 길을 올라서자 3-4m를 곧게 뻗은 대나무 숲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가 걷기 시작한지 3시간 가까이 되었을 때 버스종점 위쪽으로 1구간이 끝나는 원효사 일주문이 보였다. 이렇게 1구간 7.75km는 초반만 빼고는 대체적으로 평이한 길이라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2구간의 시작은 노랗게 물들은 단풍나무들과 같이 시작했다. 원래 단풍나무는 붉게 물들어야 정상인데 여기 있는 단풍나무는 어찌 된 영문인지 노랗게 물들어 있다. 그렇다고 병들은 것도 아닌데 계절이 잘 못된 탓일까 싶다. 2구간은 오랫동안 군부대에서 입산을 통제하다가 얼마 전 개방을 했다. 개방 후 생태보전을 위해 하루에
2구간은 절벽 같은 아주 가파른 산길이다. 계단도 많고, 깎아 세운 듯한 흙길도 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바삐 몰아 쉬며 걸었다. ‘인도행’을 따라 대여섯번을 걸었는데 그 중에서 이번이 가장 힘든 길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시간 반을 걸으니 ‘하늘이 열리는 곳’이 나왔다. 올라서니 바로 위로는 서석대가 보이고, 그 옆 멀지 않은 곳에는 시원한 벌판에 갈대밭이, 멀리로는 광주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여기서 우리 일행은 고민을 했다. 서석대까지 갈 조와 여기서 그냥 내려갈 조로 나뉘어져야 했다. 서석대까지는 약 500m밖에 남지 않았지만, 여태까지 올라온 길을 생각하면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반반으로 갈라졌다. 나는 올라가기로 하고, 일행 끝 후반에 따라붙었지만, 올라가는 걸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숨이 목에 차 오르는 걸 느낄 때쯤 깎아 세운 듯한 돌기둥 모양의 서석대가 눈에 들어왔다. 정상부근에는 키 작은 갈참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평평한 모습에 갈대들로 덮여 있다. 거기에는 ‘무등산옛길 종점’이라는 팻말이 있고, ‘옛 선조들이 올랐던 정상입니다. 11.87km 전구간 완주를 축하합니다.’라는 이정표의 안내번호 40번이 있었다. 안내판은 300m 마다 세워져 있는데 1번부터 26번까지는 1구간이고, 27번부터 40번까지가 2구간이다. 거기서 서석대까지는 채 2분이 안 걸렸다. 서석대는 천연기념물 465호이다. 비가 올 땐 실제로 반짝거리는 빛이 난다고 한다. 서석대에서 천황봉은 바로 눈앞에 있다. 거기는 입산이 통제되어 바라만 보고, 입석대를 걸쳐 장불재로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돌로 만든 돌계단도 발짝을 떼는 데 쉽지 않았고, 크고 작은 자갈길도 고통스러웠다. 더구나 어둠이 깔리고 시간에 쫒기다 보니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내려와도 2시간이나 걸렸다.
무등산옛길은 말 그대로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행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유하는 길이다.’라고 할 만큼 무등산은 전체 중 70%가 사유림이어서 무덤이 많다. 개방되기 전에도 죽은 자와 산 자의 소통의 통로로 죽은 자도 가고 산 자는 조상님 산소를 찾아 가고 그랬다. 이 길을 개방하면서 심각한 자연훼손을 우려해 옛길 이정표 안내판에 ‘옛길에서는 쇠지팡이가 필요 없습니다. 선조들의 길에 상처를 주는 스틱 사용을 자제합시다.’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은 자연이 우리에게 베푸는 것에 감사해야 하고, 그만큼 옛길도 아껴달라는 거가 아닌가.
무등산옛길을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가기에는 무리다. 보통 사람이 무등산옛길을 걸으면서 점심도 먹고, 휴식도 취하며 걸으려면 1구간이 3시간, 2구간도 3시간을 잡아야 하고, 하산하는데 3시간을 잡아 총 9시간을 잡아야 다소나마 여유가 있다. 우리는 걷기 시작해서 총 7시간도 안되었다. 어떤 이는 1구간은 트랙킹 코스이고, 2구간은 등산 코스여서 간만에 두 코스를 다 즐겼다고 하지만, 일행 중 초행자도 여럿이던데 너무 많은 부담을 준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서석대까지 갔다 오는 시간이 모두 5시간 정도 걸리는 걸로 알고 있었다. 과연 나만 그렇게 생각했을까? 여러 가지 변수 등을 감안한 좀 더 세심한 계획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아침에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이번 도보는 버스를 타고 멀리 내려오기 때문에 일반 여행에서 오는 즐거움과 등산의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것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잃은 것 보다는 얻은 즐거움이 더 컸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