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서울 도심 속의 역사탐방, 덕수궁을 가다

강일형(본명:신성호) 2017. 5. 27. 10:23




서울에 직장을 두고 수도권에서 수십 년을 살았는데도 서울시청 앞에 있는 덕수궁을 다녀온 지가 30년 가까이 된 것 같다. 덕수궁돌담장 길을 걸어본 것도 10여 년 전에 현직에 있을 때 덕수궁 옆으로 나있는 돌담길이 지금은 정동길로 바뀌었지만, 그 길을 걷다 보면 ‘정동극장’이 있는데 그 극장에서 ‘난타’라는 타악기 연주를 보러 갔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동아쏘시오그룹 임원출신 모임인 ‘우성회’의 소분과 분회인 ‘역사기행팀’에서 서울의 덕수궁(현대미술관포함), 서울시청별관13층 전망대, 이화·배재학당, 중명전(왕실도서관인데 1905년 을사늑약체결장소) 등을 돌아본 얘기를 할까 한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 2번 출구를 빠져나가 6-70m 걸으면 덕수궁으로 들어가는 대한문 앞이다. 마침 보초교대식이 대한문 앞의 광장에서 있어서 여태껏 보지 못했던 멋진 모습을 동영상으로 카메라에 담아봤다. 참고로 덕수궁 입장료는 천원이고, 덕수궁 안에 있는 현대미술관 관람료는 3천원인데 65세 이상은 무료이다. 덕수궁은 조선시대 통틀어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처음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가 돌아온 선조가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저택을 임시 궁궐로 사용하면서이고, 광해군이 이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으로 불렀으며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에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리로 이사 오면서다. 덕수궁의 유래는 경운궁에 머물던 고종이 우리나라를 둘러싼 열강들의 틈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나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왕위에서 물러났다. 왕위를 이어받은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사를 하면서 아버지인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를 올린 것에서 유래되었다.



덕수궁에는 가장 중심지에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커다랗게 세워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절의 접대 등을 주로 하게한 중화전이 있고, 즉조당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돌아와 임시거처로 사용하였으며,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고 불리었다. 석어당은 덕수궁 내에 유일한 2층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후 돌아와서 승하할 때까지 16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정관헌은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연회나 음악을 감상했던 장소로 덕수궁 내 근대 건축물 중에 가장 오래 되었다. 함녕전은 고종황제의 침전이며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그 해 다시 건축하여 그곳에서 고종이 머물다가 1919년 1월 승하하였다. 덕수궁에는 여러 건물 중 유일하게 석조건물이 있는데 고종이 침전 및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1900년부터 1910년까지 10년에 걸쳐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궁궐을 둘러본 후 덕수궁 북서쪽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관람하였다.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은데도 그림을 감상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리었다.


덕수궁을 빠져나와 정동길을 따라 얼마 안 걸어 좌측으로 서울시청 별관이 있었다. 이 건물로 들어가 엘레베이트를 타고 13층에 가서 내리니 그곳이 바로 덕수궁, 서울시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정동전망대였다. 오늘 날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멀리에 있는 북한산까지 눈으로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쾌청하였다. 그러고 보면 오늘 역사탐방 날짜를 기가 막히게 잡은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날씨가 적극적으로 협조해줬다. 흰 구름이 떠있는 하늘과 주위 도시빌딩이 둘러싼 숲속으로 덕수궁 건물이 한 폭의 그림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진작 와보지 못한 것을 나무라고 싶을 정도로 도심 속에서 좀처럼 보지 못한 풍경을 보았다.



다시 정동길로 나와 20분 걸었을까 했는데 좌측으로 ‘배재학당’이 나왔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한 선교사가 세운 최초의 사립학교로 미국 아펜젤러 목사가 1885년에 설립하여 고종황제가 1886년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내려 주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우리가 어렸을 때 나무로 된 책·걸상에 앉아 공부하던 그런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왕조사회에서 종교를 통해 사회를 개방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는데 근대교육의 시발점이 배재학당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명전은 덕수궁 안에 있지 않고 배재학당에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중명전은 황실도서관으로 처음 이름은 수옥헌이었다.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로 사용되었고,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접견한 장소이자 을사조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건물이 수리 중이라 대문이 닫혀 있어 대문 틈사이로 건물 겉모습만 훔쳐볼 수가 있다.



중명전에서 10여분 걸어 이화학당에 도착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감리교의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한 여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887년 명성왕후가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내려주면서 탄력을 받았다. 이곳에서는 초·중등·대학교육이 다 포함된다. 특히 이화학당은 여성만을 교육시켜 여성교육의 효시이자 여성 지도자를 많이 길러낸 한국 여학교의 요람이 되었다. 조선 말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의 여성교육은 전무하다시피 했는데 이화학당이 생기면서 여성교육의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 덕수궁을 탐방하면서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한국의 역사가 숨 쉬고 있는데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나 자신을 뒤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많은 외국인들도 눈에 띄던데 더는 그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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