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약용선생이 1762년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 15년을 살았고, 관직에 있다가 전남의 강진으로 유배를 18년 갔다가 와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18년을 살다가 1836년 죽을 때까지 살았던 마재(馬峴)마을을 찾아 갔다.
서울에서 찾아가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자가용을 이용할 때는 마재마을(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의11), 또는 다산유적지를 내비검색창에 쳐서 오면 되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서울 청량리에서는 167번 시내버스를 타고 오다가 다산유적지 입구에서 내려 걸어들어 와야 하고, 강변역쪽에서는 2000-1번 경기시내버스를 타고와 다산유적지 입구에 내려서 시내버스 둘 다 약 20분 가까이 걸어야 한다. 용문가는 전철을 타고 올 때는 팔당역에서 내려 가장 자주 다니는 버스가 167번이니까 환승하여 다산유적지 입구에서 하차한다. 대성리에서 출발하여 운길산역을 거쳐 다산유적지까지 들어가는 버스가 56번 시내버스가 있는데, 배차간격이 30-50분이어서 운이 좋아 만나면 타고 들어올 수가 있지만, 그렇잖으면 걸어 들어오는 편이 빠르다.
우성회 소분과 모임인 역사기행팀에서 오늘은 7명이 상봉역에서 만나 전철을 타고와 팔당역에서 내려 167번 버스로 환승하여 ‘봉주르’찻집 입간판이 서 있는 ‘원룽마을’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한강을 끼고 걷다보면 크고 작은 연못에 아직 연꽃이 필 계절이 아니라서 연꽃은 볼 수 없어도 연꽃잎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큰 길에서 10분 가까이 걸었는가 싶더니 봉주르찻집이 나오고, 찻집 옆으로 바로 언덕위에 아기를 안은 엄마와 아빠 조각상이 있다. 그 조각상 옆으로 옛날 기찻길을 포장하여 만든 강변 자전거길과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도보길을 만들어 놓아서 자전거 길을 따라 얼마 걷지 않아 우측으로 빠지면 본격적인 다산길이 나온다. 우리는 강변으로 나있는 산책로를 걷기도 하고, 마을을 지나 때로는 야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1시간 정도 걸어서 다산유적지에 도착했다. 평일인데도 주차장에는 관광버스도 몇 대 와 있고, 승용차들도 여러 대가 눈에 띄었다.
다산선생의 유적지를 돌아보기 전에 실학이 뭐고, 어떻게 해서 실학이 형성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실학을 간단히 말하면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을 일컫는다. 실학의 형성은 16세기 중엽 이후 서양문물이 동양으로 유입되면서 한국, 중국, 일본 등 3국은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일본은 조총의 수입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전국을 통일하고, 명나라는 새로운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위기를 맞게 되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토가 황폐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정부는 이러한 시대적인 어려움과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부분의 개혁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조선의 부세(賦稅)제도는 전세, 공물 및 요역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을 단일 품목인 쌀로 징수한 것이 대동법(大同法)이다. 또한 사람을 대상으로 부과하던 균역도 전결의 부담으로 돌렸는데 이것이 균역법(均役法)이다. 대동법과 균역법도 복잡한 과세물종을 전결을 대상으로 쌀로 통일하여 수취제도의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백성들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넉넉해지고 이로 인해 장시(場市)를 줄임으로 상품경제가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학문체계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기론(理氣論), 사장학(詞章學), 형식적인 예학(禮學)에 매몰되어 있었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반성으로 17세기 중반부터 학문의 목적도 인간이 추구하는 생활의 필요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실학의 시초이다.
실학 형성의 역사적 배경은 조선 내부에서 추진된 각종 개혁의 전개와 서양으로부터 자연과학의 전래였다. 토지제도 및 군신관계와 같은 제도의 개혁은 상공업의 진흥 및 기술개발을 촉진시켰으며, 자연과학의 전래는 천문학과 지리학의 발전을 자극하여 실학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했다. 실학이라는 학풍의 대두로 이제 학문의 대상은 제도개혁론, 상업진흥론, 기술개발론, 천문학 및 지리학 등의 학문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다산유적지에 들어가서 좌측으로 보면 다산기념관이 있다.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아보면 다산선생이 추구한 인간생활에서 필요한 실용학문의 가치와 깊이를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생가를 돌아보고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뒷동산에 올라가 선생의 유택을 돌아보면서 돌아가신 지가 17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도 이조 오백년을 통틀어 선생과 같이 출중한 학자요, 개혁관리에다가 정치,사회,경제,지리,철학,문학,군사학,교육학,의학 등 모든 부분에 걸쳐 500여 편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박식한 학자이며 관리(官吏)가 선생 말고 또 누가 있었겠는가.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찾기가 쉽지 않다. 유적지를 돌아보고 나오다가 실학박물관을 돌아보고 나면 다산선생이 정말 훌륭하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남산시립도서관 들어가는 입구에 보면 다산선생 동상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퇴계이황선생의 동상이 있는데 두 분이 다 훌륭한 학자라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본받으라고 세워 놓았을 것이라고 본다. 순수 학문적 측면에서는 퇴계선생의 학문이 빛났는지 모르지만, 실용학문적인 측면에서의 가치는 다산선생을 능가할 학자는 없다.
이번 역사기행은 실사구시의 학문을 집대성한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적지에 가서 선생의 숨결을 느껴보고, 실생활과 이론을 접목시키려는 열정과 높은 학식에 탄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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