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눈곱만 떼고 안양에 있는 샘병원으로 달려가 중환자실에 계신 어머니를 잠깐 들여다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세수하고 아침을 간단히 먹고는 손자가 아침에 와 있는데도 정오에 양재동 시민의 숲 건너 편에 있는 ‘더 케이 호텔’에서 지인의 예식이 있어 거길 부리나케 쫓아가야 했다.
오늘 아들내미를 결혼시키는 혼주는 오랜 세월을 같이 근무했던 나의 직장동료이기도 하고,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는 OB 모임을 같이 하고 있으니 자주는 아니더라도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얼굴을 보기도 한다. 예식장에 가보니 그래도 OB들이 꽤 많이 와 있었다. 안양에서 양재동에 있는 더 케이 호텔까지 가려면 대중교통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라 시간 반 전에 나서면 충분할 것으로 보았는데 토요일이라서 차가 많이 밀리는 바람에 식전에 혼주를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이 호텔에서 나의 조카가 결혼을 해서 여기를 왔다간 이래 꼭 1년 만에 다시 왔다. 그 때 결혼했던 나의 조카며느리가 세월호 사건이 터진 안산 단원고 3학년 담임선생님이었다. 2014년 4월 16일 2학년 학생들이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다가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을 바다에 묻어놓고, 살아남은 아이들을 모아서 다시 반을 꾸려 3학년에 올라왔는데 선생님이 결혼한다고 하니 그 학생들이 결혼식장에 와서 “선생님, 사랑해요!”하며 퍼포먼스까지 하니 그 어찌 학생들이 장하다고 말 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한편으로 같이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세상이 많이 원망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살아온 어린 남녀학생들이 선생님을 위해서 축가를 불러주니 금방 식장은 숙연해지고, 나도 어느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이가 40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않아서 오래 전에 형님은 돌아가시고 혼자된 형수님이 늘 걱정을 하시고 계신 것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이 먹은 조카가 단원고 선생님을 만나 결혼식을 올리니 “살다보니 이렇게 좋은 날도....”라는 글을 써서 조카의 결혼을 축하해주기도 했다.
요즘에는 하는 일이 별로 없다 보니 누가 불러주면 고마워서 결혼식이든 모임이든 우연만 하면 나간다. 앞으로 사람 구실하면서 살날이 10년 이쪽저쪽일 것이다. 근력이 있을 때 불러주는 데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사람이다. 불러주는 데를 부지런히 쫓아 다니다보면 좀 더 건강해져 남자의 평균 수명이 78.5세인데 그 때가지는 무난히 살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그나마 덜 서운하지 않겠는가 싶다. 불과 40년 전인 1970년대의 남자 평균수명이 58.7세이고, 여자 평균수명은 65.6세 였다. 40년이 지난 지금은 배곯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의술이 발전하여 남녀평균수명이 20년이나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세상에 살면서 아프며 오래 사는 것 보다는 그래도 건강하게 살아야 가까운 사람들한테 짐을 덜어주고, 폐를 덜 끼치고 가지 않겠는가 싶다.
오늘도 이렇게 고단한 하루를 보냈지만, 그래도 행복한 하루이기도 했다.
오늘 아들을 장가 보낸 박 사장, 다시 한 번 축하하고, 오래오래 살면서 아들, 며느리한테 효도도 받으시길 바랍니다.
2015년 조카결혼식 때 단원고 학생들의 축하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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