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해 본 사람들은 여행을 떠날 때와 돌아올 때, 늘 상은 아니지만 가끔은 마음이 달라지는 걸 느낄 것이다. 이번에 내가 그랬다. 갈 때는 한껏 마음이 부풀어서 갔는데 돌아올 때는 진력이 났다. 열 시간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온 이유도 있겠지만 그 보다 터키에서 이동시 먼 거리는 국내선 비행기로 이동했는데도 어느 때는 하루에 8-9시간을 버스를 타고 달려야 하니 그 어찌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오면서 다시는 여행을 안 간다고 해 놓고는 일 년만 지나면 다 잊고 또 떠난다. 그래서 여행도 마약이라고 여러 사람이 얘기를 하는가 보다.
안 가본 세상을 간다고 하면 그 세상은 어떨까 해서 또 집을 나와 가보면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우리네 살림살이하고 별 차이도 없는 데도 가보면 신비로운 세상이 있을 것 같아서 가고 또 가고 그런다. 물론 여행을 가지 않는 것보다 가서 얻는 즐거움이 크다고는 하겠지만 이번처럼 여유가 없이 차에서, 비행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도 처음인 듯하다. 우리보다 나이가 더 드신 분들도 꽤 계셨는데 그 상황에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돌아오는 날까지 잘 버티셨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스, 터키를 갔다 온 얘기를 해 볼까 한다. 아직 여행에서 오는 여독이 남아 있어서 몸은 무겁고, 눈꺼풀은 아래로 짓누르고 있지만, 끝까지 글을 다 쓸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전에 같으면 여행에서 돌아와서 하룻저녁만 자판을 토닥거리면 금방 글한 편을 썼었는데 이번에는 쉽지 않다.
먼저 그리스얘기를 해보자. 세계인구중 25%인 15억 명이 쓰고 있는 영어의 알파벳이 여기 그리스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무리 우수한 문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는다면 그 가치는 떨어지게 되는데, 알파벳문자는 우수성을 따지지 않더라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한 문자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지금은 그리스가 IMF구제금융을 받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지만, 칭찬하나를 더 얘기해 보면 고대부터 유명한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들이 많았고, 대중정치가 잘 발달된 국가이기도 하다. 그리스의 전체 인구는 2011년 기준으로 1200만 명이 조금 안되고, 국토크기는 남한보다 조금 더 크다. 아테네에는 자국민들이 480만 명이 살고 있고, 외국인들이 120만 명해서 약 600만 명이 살고 있다. 그리고 날씨는 우리 남한보다 위도가 높은 39도인데도 겨울이 섭씨 영상 3도에서 10도를 유지하여 포근한 반면에, 한 여름에는 영상 43도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더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대충은 감이 올 것으로 본다.
우리가 간 아테네에서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 지역이 약 90km가 떨어져 있다고 하는데 그 곳에는 베드로성인의 동생인 안드로가 순교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바쁜 일정 때문에 거기를 들르지를 못했다. 공항을 빠져 나와 얼마를 달리니 길옆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가 올리브나무이다. 나지막한 산에는 척박해 보이는데도 여기저기 올리브를 심어서 푸르름을 유지해 그런대로 보기가 좋았다. 올리브나무는 약 4-500년을 산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소나무나 느티나무하고 수명이 비슷하다.. 4-500년을 살면서 최초 수확은 25년 정도 자라게 되면 시작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 400여년을 씨를 뿌려 자기가 이 세상에 왔다간 사실을 남기고 간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살고 있는 아테네 도심의 한길에는 가로수가 온통 오랜지 나무인데 황색의 오랜지가 엄청나게 달려 있다. 건물은 대개가 5층 이하이고, 조금 높다고 한 건물이 7층이었는데, 이런 것들이 다 지진이 많아서 건물을 높게 짓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도 우리가 조상님들한테 알게 모르게 경험에 의해서 터득한 지식이 있는 것처럼 자연재해로부터 그들의 삶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그렇게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삶의 모습이 문헌으로 남기지 않더라도 구전으로 전해지고, 몸으로 터득한 지혜이지 않겠는가.
가다보니 저피온공원이 나왔는데 거기서 살고 있는 식물이 약 500여종이 있다고 한다. 거기를 막 지나면 제우스 신전이 나온다. 그곳은 약 2600여 년 전에 여러 잡신을 모시던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덩그렇게 기둥 몇 개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곳을 빠져나와 10여분 남짓 오르막길인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니 파르테논 신전이 나왔다. 여기도 건물은 무너지고 기둥만 남았는데 수리를 한다고 철골조를 세워놓아서 모양새는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세계문화유산 제 1호라고 하니 그 어찌 쉽게 지나칠 수가 있겠던가. 거기서 사방을 둘러보니 아테네 시내가 한 눈에 다 들어왔다. 비록 땀은 흘렸지만 잘 왔다 싶다. 내려와서는 소크라테스가 감옥에 갇혔다는 곳을 잠깐 둘러보았다. 그 곳을 뒤로하고 시내로 들어오니 근대올림픽경기장이 나오고, 조금 더 가니 대통령궁이 나왔다.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는 거의 5시간 반을 달려서 도착한 곳이 메테오라 수도원이 있는 근처의 호텔이었다. 여기가 테실리아 지방에 있는 칼람바카마을인데 아테네에서 서북쪽으로 440km 떨어져 있다.
이튿날 아침을 서둘러 먹고, 버스로 20여분을 산골짜기로 올라가 경치가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 곳에다 차를 세웠다. 수백 미터가 넘는 괴암 꼭대기 여기저기에 집이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14세기 중반에 메테오라 출신의 아사나시오스 수도사에 의해 처음 생기기 시작해서 24개의 수도원이 있지만, 지금은 6개만이 사용되고 있다. 그중에서 수녀원은 유일하게 스테파노 수녀원 한 곳뿐이고, 큰길에서 편안하게 걸어들어 갈 수가 있는 수도원도 거기뿐이다. 특히 메테오론 수도원과 발람 수도원은 치마를 입지 않은 여자들은 보자기를 둘러야 들어갈 수가 있을 만큼 규율이 엄격했다. 또한 트리니티 수도원은 007영화촬영지로 유명하다. 바로 이곳이 천주교를 믿는 수도사와 수녀들이 진력으로 수련하는 메테오라 수도원이다. 산꼭대기 바위 위에다 집을 짓고 거기서 수도를 했다고 하는데 한 번 들어오면 여간해서는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가 없을 만큼 엄격한 수도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들어오면 나가고 싶어도 도저히 나갈 수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지금도 발람 수도원에서는 도르래에 그물을 달아 식품과 잡화를 끌어올린다고 한다. 발람 수도원은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내부 벽화도 보았는데, 벽에 있는 성화를 보며 주위를 한 바퀴 돌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은 것과 같다고 한다. 나올 때 보니 포도주를 담아 숙성시키는 커다란 오크통도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수행이다. 이른 아침이라 날씨는 썰렁하고 바람은 세차게 불었지만 그곳에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마테오라를 뒤로 하고 5-6시간을 달렸던 것 같다. 터키 국경지대인 압살라가 나왔는데 그리스 아테네를 올 때는 비행기를 타고 왔었지만, 갈 때는 버스로 이동하다 보니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국경을 통과할 때는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서 해가 서산에 걸칠 때쯤 그리스에서 타고 온 버스에서 내려 터키버스로 갈아탈 수가 있었다. 그리고도 얼마를 달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주 늦은 한 밤중에 터키의 차나칼레 호텔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해야 했다.
터키를 본격적으로 여행하기 앞서 터키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자. 터키의 위치는 아시아 서쪽 끝에 있는 나라로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해주고 있다. 국토크기는 남한의 약 7.8배이고, 인구는 7,500만 명이다. 국경은 아시아와 유럽의 8개국과 같이 하고 있고, 수도는 앙카라이지만 인구 1300만 명이 살고 있는 이스탄불이 터키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터키에서의 우리 일정은 서남부 해안지방인 차나칼레, 페르가마, 이지미르, 에페소, 파묵칼레를 들렀다가 남쪽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안탈리아를 지나 중부 내륙지방인 코냐, 소금호수, 가파도끼아를 보고 카이세리로 이동해서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갈 예정이다.
터키에서 고된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눈을 뜨자마자 고난의 행군은 계속 되었다. 새벽 5시에 기상을 해서 씻고, 밥 먹고, 7시에 출발하여 지겹도록 갔는가 싶더니 카돌릭의 고대도시인 에페소가 나왔다. 가이드의 말을 잠시 빌리면 이 도시의 역사는 기원전 6000년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아이술록 언덕주변 고분지역이 청동기시대와 히타이트 시대의 거주 지역이었음이 밝혀졌다. 본격적인 건설시기는 기원전 1500년경이며. BC 1050년경에는 그리스의 이주민들이 고대항구도시 에폐소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BC 560년 경에는 아르데미드 신전주위가 도시의 가장 중심지이라고 한다. 현재 위치의 에폐소는 BC 300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였던 리시마코스 장군이 건립하여 로마시대에는 최고 10-20만 명까지 거주했다고 한다. 이런 큰 도시가 기원후 3-4 세기경에 키메르인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하나 아마도 지진이나 자연재해 등의 영향을 받아서 매몰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지금은 한참 발굴 중이고 복원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중에서 일부 발굴한 2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셀수스도서관, 교회 등은 아주 오래전의 도시규모를 가늠할 수가 있다.
특히 그 때 당시도 성을 파는 집창촌이 있었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발모양을 돌에 새겨놓고, 발을 대 봐서 그 보다 발이 작은 사람은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에도 어린 사람이나 청소년들을 제재할 수단과 방법이 마땅치 않았는지 그렇게 해서라도 보호하려고 했던 노력을 엿볼 수가 있다. 또 하나는 화장실의 모습이다. 아마 공중화장실 같은데, 칸막이가 없이 돌로 된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가 뚫려 있고,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볼일을 보면 밑으로는 물이 흘러 떨어뜨린 것을 흘러가게 해 놓았다. 그 당시에는 화장지가 없었으니 볼일 본 후, 손으로 해결하고 씻는 곳도 별도로 있었으니 위생적인 부분도 고려한 듯하다. 산위에는 사도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와서 기거하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에폐소는 카돌릭과도 유서가 깊은 도시이기도 하고, 기원전후를 해서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아주 큰 도시가 있었다는 것을 그 흔적이 말해주고 있다.
다시 버스에 올라 수 시간을 달려서 해가 넘어갈 무렵이 다되어서 목화의 성이라고 불리는 파묵깔레 온천 휴양지에 도착했다. 별4개 호텔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모텔보다도 어림없는 허술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뜰 안에 큼직한 수영장도 있었는데 물은 나뭇잎들이 날아 들어와 지저분했고, 깨끗하지 못한 물에는 사람 대신에 개구리만이 헤엄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실내온천장으로 이동해 온천욕을 했다. 온천욕을 끝내고 늦은 시간에 시내를 나갔는데 관광지이다 보니 늦은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튿날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대 로마시대의 거대한 원형극장과 주거지역이 남아 있는 히에라폴리스로 이동하여 새하얀 석회암위로 흐르는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그동안 쌓였던 발의 피로를 풀었다. 신발을 신고 성곽을 따라 걸어서 올라간 곳이 크레오파트라가 이집트에서 여기까지 와서 온천욕을 즐겼다는 자연온천 수영장이 나왔다. 일부 외국인들이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즐기고 있었고, 맑은 물속에는 옛날 건축물 원형 그대로가 물속에 가라앉은 채로 보이기도 했다.
다시 버스에 올라 수 시간을 남쪽으로 달려서 저녁나절에 도착한 곳이 터키의 남부에 위치한 안탈리아 항구도시이자 휴양도시이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아름답기로 이름이 나 있어서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동양 사람들보다는 서양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 넘쳤다. 얘기 듣던 대로 바다, 태양, 역사, 자연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여느 항구도시에서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역사 속에 묻혀 진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지중해인데다가 항구자체가 양쪽 지형으로 감싸 안은 듯 옴팍하게 들어가 있어서 파도가 전혀 없고, 바로 육지에서 강물이 바다로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는데도 바닷물은 아주 깨끗해서 마치 청색물감을 쏟아 부어놓은 듯 했다. 유람선에서 육지를 바라보니 수십 미터 되는 절벽위에는 아파트들이 그림같이 서 있다. 군데군데 절벽에는 바다로 물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맨 마지막에 보는 폭포수는 바다로 떨어지는 물의 양이 많고 절벽이 길어서인지 바다 쪽으로 고운 무지개를 만들어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절로 나오게 한다.
오늘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버스투어를 하는 날이다. 안탈리아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 코냐를 거쳐 가파도키아까지 가는 데는 무려 10시간을 넘게 버스를 타야 했다. 도심을 빠져나와 한참을 가다보니 길은 계속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먼 산 위쪽으로 하얗게 보이던 눈이 바로 옆에 와 있을 정도로 지대가 높다. 터키는 2000m가 넘는 산이 많고, 4000m가 되는 산도 있을 정도로 지대가 높은 곳도 있다. 고개를 넘어서서 얼마안가 산도 보이지 않고 끝없는 평원이 계속되는 고속도로를 대여섯 시간을 달렸는가 했는데, 단단하게 지어놓은 커다란 성같은 건물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여기가 실크로드를 이용하던 상인들이 쉬고 잠을 자든 여관이다. 여관의 규모가 대단했다. 상인들의 상품 중에는 값비싼 고가품이 있기 때문에 외부도적들로부터 자신들의 생명과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잠잘 때는 이런 여관을 이용한 것으로 본다.
다시 버스에 올라 신물이 나도록 달려서 저녁나절이 다되어 30여개의 석굴도시가 있는 괴뢰메로 이동하여 로마병사로부터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숨어 지내던 지하도시인 데린구유를 관람했다. 사람이 간신히 엎드려 들어가야 하는 곳도 있지만, 집회 장소는 널찍하게 만들어 놓기도 했다. 외부침입자가 들어오면 들어오지 못하도록 큰 맷돌로 출입문을 막을 수 있는 시설도 있고, 또한 깊은 우물물도 있었다. 여기서 지내는데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자기가 믿는 종교를 지키기 위해 고단한 삶을 살아간 그들의 힘든 삶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친절하고 사랑스럽다는 뜻을 갖고 있는 가파도키야에 도착하여 하루종일 차에 시달린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기가 무섭게 버스로 30여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동굴술집으로 이동하여 공연도 보고, 술도 마셨다. 와인과 전통독주인 ‘라카’는 무한 리필이었지만 저녁을 먹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한두 잔 밖에 마실 수 없었다. 술집이 동굴 속에 있다고 해도 수백 명이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실 수가 있고, 가운데로 춤추고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이 널따랗게 자리를 잡고 있다. 한국 사람도 다수 보이지만 서양 사람들이 여기저기 더 많이 보였다. 늦은 밤까지 공연도 보고 신이 난 관광객들은 그들과 한패가 되어 가파도키아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가파도키아는 터키의 수도에서 약 300km 떨어져 있다. 아침을 먹고는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파도키아의 명물인 버섯모양의 괴암과 괴암절벽에 파놓은 비들기집, 예전에 그 바위에 사람들이 굴을 파서 집으로 살던 곳을 보러 갔다. 계곡을 내려가 가까이에서 보는 버섯바위는 워낙 키가 커서 전체를 볼 수가 없었지만, 산 능선으로 올라와서 아래를 훤히 내려다보는 커다란 버섯바위는 그 모양하나하나가 장관이다. 계곡마다 모양새를 달리해서 펼쳐지는 전경은 마치 내가 딴 세상을 온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했다. 대만에 갔을 때 야류공원에서 본 버섯바위가 작으면서도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면 이곳의 버섯바위는 웅대하면서도 적지 않은 큰 즐거움을 주었다. 세계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연경관이라 자랑할 만하다. 터키에 와서 본 자연경관 중에서 가장 훌륭했다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카파도키아에서 이스탄불로 가기 위해 카이세리 공항으로 이동을 하다 보니 가는 도중에 우측으로 3916m의 에르지에스산이 보였는데 산 중간부터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우리가 가는 지역도 1500m를 넘는 지역이라 상당히 높은 지역인데도 아주 높게만 느껴진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산 정상을 볼 수가 없다고 하는데 우리가 지나가며 볼 때는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 볼 수가 있었다. 카이세리 공항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는 예상보다 1시간 넘게 지연되어 출발했다. 이스탄불에서 그리스 갈 때도 별다른 이유 없이 취소를 해서 수 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음 비행기로 간 기억이 있는 터라 터키가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지난 달 한국을 떠나올 때 안양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 우리 내외만 태우고도 인천공항을 갔던 것이 생각났다.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손님들이 없다고 임의로 취소를 하고, 연기하면서 고객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터키항공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호텔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할 때는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우리 때문에 퇴근도 못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호텔종업원들한테 많이 미안하기도 했다. 우리의 빡빡한 일정도 한 몫 했겠지만, 터키항공만 연착이 안 되었어도 이렇게까지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여행 한 지가 근 열흘 가까이 되다 보니 이제는 슬슬 피로가 쌓이고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이스탄불 시내로 들어갔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위치한 이스탄불은 2000년이 넘는 역사에 걸맞게 동서양의 문화와 상업의 교류역할을 다해 왔다. 세계를 지배한 3대 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스탄불은 오늘날에도 도시 곳곳에 과거 번영했던 시절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어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가운데에 두고, 구도시와 신도시로 구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교회가 많이 있듯이 이스탄불에도 모스크사원이 아주 많이 있다. 어디를 가든 쉽게 눈에 띠는 것이 이스람사원이다. 지금은 정부의 조처로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히잡을 쓰던 것을 못 쓰게 했는데도 시내를 다니다 보면 아직도 히잡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슐탄 아흐멧의 불루모스크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한참을 기다려 차례가 되면 신발에 비닐덧신을 신어야 했다. 사원 안에는 커다란 광장에 아무 것도 없었고, 푸른 타일로 각기 독특한 문향을 갖춘 천장과 벽에는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고풍스럽고, 은은한 무늬의 장식과 그림이 가던 길을 멈추게 했다. 사원을 빠져나와 반대편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성소피아 성당이 나온다. 이 성당은 현존하는 최고의 비잔틴 건축물로서 1520년 스페인의 세비아성당이 생기기전까지만 해도 약 1000년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기원후 360년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2세에의해 건립되어 라틴족의 지배를 받던 1204년에서 1261년을 제외하고는 1453년까지 오랜 세월을 콘스탄티노폴 대성당이었지만 오스만투르크제국 지배하에 있던 1453-1931년까지 478년 동안에는 이스람사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45년 2월1일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이슬람사원으로 있는 동안에는 성당을 사원으로 개조하기 위해 벽화그림이나 문향을 개조내지 훼손해서 일반적인 성당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함이나 독특한 성당의 멋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자리를 옮겨 돌마바흐체 궁전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궁전 들어가는 입구에는 표를 끊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는데, 줄을 선지 2시간이 다 되어서야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 궁전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제31대 술탄(왕) 압술마지드가 1853년에 대리석으로 지었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을 본떠 지은 유럽풍의 건축물이다. 터키의 건국의 아버지인 케말 아타튀르크가 사망할 때까지 사용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사받은 750개의 전구로 장식된 상들리에가 황제의 방 천장에 매달려 있고, 이곳 궁전에 사용된 순금이 14톤, 은이 40톤이 들어갔다고 한다. 크고 작은 방을 다 합하면 285개이고, 각종 홀이 43개이며 궁전내부를 돌아보는 데만 2시간이 소요된다. 궁전에는 시계가 156개가 있지만 9시 5분에 모두 서 있다. 그 이유는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궁전 후문으로 나가보면 바로 바다와 맞닿는다. 파도가 없이 잔잔하여 해일이나 파도는 걱정 없다고 하니 참으로 축복 받은 나라다.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시장 점포가 5000개나 된다는 그랜드 바자르로 시장구경을 갔다. 정말 시장규모는 대단했다. 이리저리 길이 있어서 한 번 길을 잘 못 접어들면 길 잃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들어갈 때 입구에서 시장번호를 카메라로 찍어 가서 길을 잃으면 그것을 보여주고 찾아와야 한다. 외국에 다니면서 이렇게 큰 시장은 처음 봤다.
우리는 보스프러스 해협으로 이동해 크루즈 유람선을 탔다. 깨끗한 바다위로 배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간다. 해협 양쪽으로 펼쳐지는 도시건물들이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구도시와 신도시를 이어주는 대교가 멀게, 높게만 보이더니 바로 눈앞에 있다. 석양에 비친 마을과 뒷동산, 뒷동산에 핀 붉은 꽃들이 저마다 광채를 내면서도 조화롭다. 이렇게 이스탄불의 석양은 짙어만 갔다. 짙어가는 석양과 더불어 터키여행도 끝내야 할 시간이다. 얼마 안 있어 어둠이 내리면 여행에서 오는 고단함과 안 좋았던 기억들은 여기 이 바닷물에 모두 내던지고 좋고, 아름다운 기억만을 마음에 간직한 채 여기를 떠나자고 다시 한 번 다짐을 해본다.
터키에서 오랫동안 우리를 위해 하루에 수백km를 태우고 다녔던 기사 선생께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고 싶다. 원래 장거리를 뛸 때는 보조기사를 대동하는데, 대리기사도 없이 혼자 몇날 며칠을 운전하기가 얼마나 힘들었겠나! 그냥 타고 다녀도 이렇게 힘든데......... 그리고 우리와 같이 여행을 같이 한 여행동지, 가이드선생 등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석굴도시가 있는 괴뢰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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