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역 1번 출구에서 우리 일행이 만날 때가
이 길을 걷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우이령은 1968년 이전에는 지금처럼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누구나 가고 싶으면 아무 때고 갈 수 있었다.그러나 42년 전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북에서 특수부대가 완전무장을 하고 우이령길로 내려와 안국동 종로경찰서 앞에서 검문에 걸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가 거의 사살되었고, 김신조만 간신히 살아남았던 그 사건 이후 오래도록 통행이 막혔다가 지난해 7월에 우리들에게 통행이 허가 되었다. 작년에 개통되어 많은 사람들이 우이령 길을 걸었는데 자연훼손을 우려하여 지금은 하루에 장흥 교현에서 500명, 우이동에서 500명만이 통행 하루 전에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신청을 해서 허가를 받아야 이 길을 걸을 수가 있다.
우리 일행은 교현에서 우이동으로 넘어갔는데 올라가는 길이 돌멩이, 나무뿌리가 없는 흙 길인데다가 가파르지 않고, 완만하여 나이가 많으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어린 손자, 손녀를 데리고도 충분히 걸을 수 있을 만큼 걷는 것이 편안했다. 훗날 그게 언제가 될지 몰라도 나에게도 여건이 되면 손자, 손녀와 같이 이 길을 한번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길을 걸었다. 그런데도 길을 걷는 내내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생태계 보존을 위해 통행인원도 제한하면서 군데군데 보이는 군 훈련시설은 자연경관을 해치고 자연생태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해본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오르막을 올라와 내리막 길에 접어들자 내리막 길은 오르막 길에 비해 그리 좋지 않았다. 크고 작은 돌멩이가 많았고, 길도 울퉁불퉁했다. 그래도 내려가는 길이어서 그런지 마음에 여유는 더 생겼다. 길가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향기가 코끝에 닿았고, 한여름에나 들을 수 있는 시끄러운 말매미 소리가 아닌 보리매미 울음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 잔잔하게 내 귓가를 스쳤다.
이렇게 우리는 사기막골에서 교현리, 석굴암을 들러 우이령을 넘어 동네 길로 들어왔으니 10km는 족히 걸은 것이다. 시간을 보니
점심을 먹고 안 사실이지만, 아직도 걸어야 할 거리가 10여km가 남았다고 듣게 되었다. 북한산 둘레길 44km 중 첫째, 둘째 날은 점심먹고 끝날 정도로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 코스였다면 마지막 날은 앞에 1일차, 2일차보다 좀 길게 많은 시간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밥을 먹고 나면 걷기가 싫어지고, 쉬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라면 당연하다. 더구나 오전에 걸은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우리는 또 걸어야 했다. 나는 오늘 하루 만 참석을 했지만, 일행 중 대여섯 분은 오늘까지 3일째를 걷는 것이어서 상당히 힘들어지고, 고통이 나타나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연세가 드신 분들한테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점심을 먹고 우이동 도선사 입구에서 걸은 지 두 시간 남짓 지나 높지 않은 산장등성이를 올랐다가 막 내리막이 시작되는데, 두 사람이 만나면 간신히 비껴가든지 아니면 한 사람이 기다려줘야 하는 작은 산길이었다. 좌측으로는 곧은 소나무가 꽤 많았고, 그 밑을 걸을 때 길에 떨어진 솔잎을 밟고 걸으니 폭신폭신한 것이 마치 양탄자를 밟는 듯 편안해 기분이 좋았다. 갑자기 “맹자” 님의 “人生 三樂”이 생각 났다. 부모형제의 무고함이 一樂이요, 하늘에 부끄럼이 없는 것이 二樂이고,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三樂이라 하셨는데 국문학자이셨던
우리가 정릉 청수장에 도착할 때는 이미 날은 저물고 어둠이 찾아왔다. ‘걷는 다는 것’ 혼자라면 도저히 걸을 마음도 실제로 걷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처럼 내가 이렇게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이 걸어준 여러 친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같이 걸어준 친구들,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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